이인숙 작가
이인숙 작가

[고양신문] 2016년 겨울 광화문 광장에 울려 퍼지던 노래 <상록수>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가수 양희은의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거대한 합창이 밤하늘을 채웠다. 1987년 이한열군의 노제에서 수만의 군중이 합창하던 <아침 이슬>은 크고 작은 집회에서 어김없이 불리던 애국가 같은 노래다. 그를 생각하면 <친구> <백구> <작은 연못> 같은 아름답고 슬픈 노래들도 떠오른다. 70년대에 알음알음으로 알게 된 노래굿 <공장의 불빛>도 잊을 수 없다. 인천 피혁공장에서 일할 때 공장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에 절박한 심정으로 만든 노래극이다. 1970-80년대에 젊음을 보낸 사람들은 김민기라는 이름을 다 알고 있었다. 라디오나 공중파에서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얼굴도 볼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노래를 만든 이, 그는 그림자 같은 사람이었다. 

  우리의 젊은 날을 함께 했던 김민기의 노래들은 그 시절의 암울한 공기와 함께 저항하던 우리들의 아픔과 열정을 소환한다.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우리들 노래의 주인공 김민기가 암 투병중이라고 한다. 얼마 전 홍세화 선생의 부음을 듣고 안타까움과 함께 한 시대가 가는구나 하는 느낌에 가슴이 서늘했는데, 김민기 선생, 제발 이겨달라고 빌고 싶다. 

최근에 한 공중파에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라는 독특한 제목으로 그림자 같은 사람을 불러냈다. 왜 ‘뒷것’인가. 극단 ‘학전’을 만들어 배우들을 키우고 가르치면서, 무대에 서는 배우들은 ‘앞것’이고 자신 같은 스탭은 ‘뒷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역시 그다운 생각이다. 초짜 배우들을 가르치고 그들이 무대에 설 수 있도록 같은 이름의 소극장까지 만들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 그림자처럼 ‘앞것’들을 뒷바라지하는 ‘뒷것’의 역할이 그가 자임한 역할이었다. 다큐에서도 김민기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학전’ 출신 배우들이, 혹은 인연이 있는 가수들이 나와 증언을 하는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민기의 새로운 면모들이 드러났다. 집요한 감시를 피해 시골에서 농사지을 때 농민들이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직거래를 튼 일, 무대에 서는 것을 싫어했던 사람이 달동네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 설립 기금을 위해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일, 특히 아동극 공연에 힘썼던 일 등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대학로에 있던 ‘학전’은 수많은 무명 배우들의 보금자리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극배우란 배고픈 직업이다. 잡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무대에 섰던 배우들, 극단 ‘학전’ 출신 가운데 이제 우리가 다 아는 유명 배우로 성장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들도 한때는 신인이었고 배고픈 무명배우였다. 그런데 김민기는 연극계 처음으로 배우들과 계약서를 쓰고 일정한 급여를 지급했다. 계약서라는 것을 처음 써본 배우들, 처음으로 4대 보험에 가입해 은행에서 전세 대출을 받았던 스탭은 감격스럽게 사실을 증언했다. 식권을 받았던 사실을 증언하는 배우들의 표정은 특히 즐거워보였다. 배우들의 처지를 잘 아는 김민기가 그들이 굶지 않도록 신경을 썼던 것이다. 사는 집까지 잡혀 가면서 배우들의 급여를 지급했다고 한다. 다행히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입소문을 타고 수천 회 공연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학전’ 앞에는 연일 장사진이 섰다. 필자도 90년대에 학생들과 같이 <지하철 1호선>을 보러 가서 배우들과 함께 울고 웃던 기억이 있다. 다큐를 보면서 지난해에 봤던 ‘어른 김장하’가 떠올랐다. 존경할 만한 어른이 드문 시대에 김민기는 또 한 사람의 ‘어른’이었다. 

  그 ‘학전’이 더 이상 운영이 어려워 문을 닫게 되었다. 문 닫기 전 마지막 공연이 있던 날, 마침 일 때문에 대학로에 있던 나는 아쉬운 마음에 일행을 떠나 ‘학전’으로 향했다. 공연 중이라 안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사진만 찍고 돌아섰다. 오늘밤에는 김민기의 노래를 들으면서 잠들어야겠다. 묵은 상처를 감싸주는 듯한 김민기의 웅숭깊은 저음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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