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비슷한 거 하는 M세대의 글쓰기>

[고양신문] 작가이긴 하나 소설가는 아니고 극본 작가이긴 하나 시나리오 작가는 아닌, 애매한, 그러나 쓰지 않는 삶은 견딜 수 없는, 또 그런 것 치곤 자잘한 생계 활동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 사람으로서 저는 요즘 폐허 위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

동아신춘문예 ‘차석’으로 기세 좋게 한 해를 열었으므로 올해는 뭘 좀 써보겠다며 이를 갈았습니다. 마침 2월에 큰 강의도 잘 마쳤고, 3월에 라디오 극본만 쓰면 이후 두 달은 생계 활동 없이도 생활 가능한 돈이 수중에 떨어질 터였습니다. 좋아, 신인상 한 번 타보자! 이것이 저의 연초계획이었습니다. 

그렇게 3월 스무날 동안 극본만 썼고, 친구에게 슬쩍 보여줬더니 네가 쓴 것 중 제일 재밌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사람이 염치가 있으면 이런 말을 하는 게 쑥스러울 법도 한데, 그런 건 나 몰라라 할 정도로 재밌었습니다.

폐허같은 저희 집 베란다에도 쑥갓꽃이 피었습니다. [사진제공=김수지]
폐허같은 저희 집 베란다에도 쑥갓꽃이 피었습니다. [사진제공=김수지]

재미의 핵심은 일종의 안타고니스트 역할인 부자 캐릭터에 있습니다. 그는 굴지의 엔터테인먼트사 대표로 나오는데, 핍진성을 위해 회사는 카카오 엔터를, 대표의 이미지는 요즘 한반도 이슈맨인 방 선생을 모델로 했습니다. 어도어 기자회견이 있기 두 달 전에 구상한 내용이니 시대를 내다보는 저의 안목이 첨단을 걸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극본은 거절당했습니다. 피디는 부자 캐릭터를 보자마자 방 선생이 떠올랐는데, 그는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며, 그의 명석함에 대해 오래도록 설명해줬습니다.
“제가 지금 방 선생 다큐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만….”

그러자 피디는 극본의 모든 것을 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애초에 명문대를 나온 여자주인공이 남의 집 가사관리사를 한다는 것이 설득력이 없고, 인물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부족하고….

명문대생이고 자시고, 쌀이 떨어졌는데 월 3백짜리 가사관리사 일을 마다할 이유가 뭐고, 인물들 전사를 다 쓰면 방송을 두 시간을 하겠다는 건지, 대화를 하면 할수록 거대한 벽이 느껴졌습니다. 문제는 이 벽이 단순히 의견의 영역에만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작가가 3주 동안 쓴 원고에 대해 기획료도 주지 않겠다고 버티고 서 있는, 엄연한 현실의 벽이었습니다. 

그 확고부동한 갑질의 벽은, 시간적으로는 제 3월을 잡아먹었고 금전적으로는 제 한 달 치 생활비를 잡아먹었습니다. 그로 인해 두 달은 글만 쓰겠다는 애초의 계획이 틀어져 저는 다시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메일에는 꼼꼼한 피드백을 줘서 고맙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제 자신이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조금도 고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디는 작가의 밥줄이므로, 혹시 모르니,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던 겁니다.

저희 집 참새는 좀 단호합니다. [사진제공=김수지]
저희 집 참새는 좀 단호합니다. [사진제공=김수지]

저는 단지 뭔가가 쓰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뭔가를 쓰기 위해선 어느 한순간은, 생계가 무너지든 말든 그 폐허 위에서라도 쓸 결의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늘 폐허 앞에서 아무래도 안 되겠어, 하며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작가이긴 하나 소설가는 아니고, 극본 작가이긴 하나 시나리오 작가는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녀석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안 되겠어, 하고 돌아선 후 이런저런 일자리에 지원했고 면접을 봤고 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코앞까지 다가온 폐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지금인가?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후 보름째 뭔가를 쓰고 있는 걸 보면 답은 이미 내려진 것 같습니다. 

통념과 달리 쓰는 일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아주 와일드한 작업입니다. 일상을 폐허로 만드는 것들과 맞붙어가며 뭔가를 써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모험가들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모험이 폐허 위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짜릿합니다.    

[사진제공=김수지] 망가진 가방으로 화분을 만들었습니다. 그 안에서 고수 씨가 싹을 틔웠습니다. 
[사진제공=김수지] 망가진 가방으로 화분을 만들었습니다. 그 안에서 고수 씨가 싹을 틔웠습니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