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호의 사람도서관 (15)
이정환 능곡동 한국기독학생연합 활동가

이정환 능곡동 한국기독학생연합 활동가.
이정환 능곡동 한국기독학생연합 활동가.

[고양신문] 최근 마을에서 청소년들을 볼 적마다, 청소년들이 가족과 학교, 사회에 대한 슬픔과 분노, 불안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이웃으로, 친구로서 청소년들과 어떤 모습으로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야할지 고민하게 되는데, 오랜 시간 능곡동에서 청소년들의 곁을 지키며 도왔던 한국기독학생연합의 이정환 활동가를 통해 그 실마리를 얻고자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지금의 어른들은 절박한 환경과 불우한 사회를 통해 청소년시절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하며 너무 빨리 어른이 되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을 건너뛰고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서 일까요? 지금의 어른들은 청소년들과 무엇을 말하고 어찌 지내야하는지를 잘 모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어느 세대도 마찬가지겠지만 환대 받았던 청소년시절의 기억과 내 곁을 지키는 친구들의 온기와 우정이 많지 않다는 게 큰 문제입니다.”


어린 시절 풍경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3~4살 때 서울 봉천동에 살았습니다. 마을에는 공동우물이 있었는데 당시 동네에는 수도라는 개념이 없어서 그 우물물을 길어 마을사람들은 빨래도 하고 식수로도 썼어요. 저보다 조금 더 큰 형들이 두레박을 이용해 제게 우물물을 길어줬는데, 어린 저는 그게 너무 하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야 말할 수 있지만, 저는 오랜 기간 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이미 다른 가정이 있었고 당시 어머님은 목사님이셨는데 제가 존경할 만한 종교인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두 분 다 가족을 살뜰히 챙기는 부모님이 아니었기에, 저는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좋은 기억이 거의 없었어요. 너무 가난하고 불안한 일상이 반복됐는데 그래서 그 시절은 ‘무섭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라는 감정만 가득했습니다. 환경 영향 때문인지 저는 일찍부터 어른에 대한 존경이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을 추억할 만큼 좋은 기억이 많지 않다보니, 어른이 된 지금의 저는 제가 만나는 아이들, 젊은 친구들에게 되도록 좋은 기억을 남겨 주려 애를 쓰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청소년 시절은 어땠나요.

저에게 청소년기는 위축되는 것에 익숙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나를 보살피는 부모님이 없었는데 반해, 경제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무척 잘 살았던 내 동갑내기 친척들이 심지어 같은 동네에 살았으니깐.
당시의 학교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잔뜩 모인 교실에서 저처럼 가난한 학생을 앞에 불러다가 라면이나 생필품 같은 것을 전달해줬는데, 다른 친구들이 그걸 보고 박수를 치는 장면들이 저에게는 많았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늘 익숙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가난하다고 나를 못살게 굴거나 불쌍해하는 친구들을 저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어요. 살다보면 나쁜 사람들을 만나 좋지 않은 감정과 경험에 휘말릴 수도 있었을 텐데, 위태하고 위축된 저의 어린 시절에 다행히도 그런 경험이 없다는 건, 돌아보니 저에게 아주 큰 복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사하다는 단어를 일찍부터 머릿속에 떠올리는 청소년이 됐고 이런 경험이 훗날 자연스레 저의 신앙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어요. 감사해야할 대상이 필요했으니까.
고등학교 때는 신문배달, 우유배달, 전단지 끼우는 일 등 당시 학생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는데, 내가 생활하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저는 일찍부터 알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저의 주된 감정은 늘 긴장감이었어요. 일찍부터 어디에서나 늘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그렇다고 저는 이 상황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사람이 돼야겠다, 꼭 성공해서 보란 듯이 살겠다 이런 마음으로 스스로를 부추기거나 억누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간단한 개인소개와 최근 근황을 소개해주세요.

저는 지금 고1의 딸, 고3의 아들을 둔 두 아이의 아빠입니다. 행정에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애매모호한 자격과 안타까운 상황의 청소년들, 학교를 그만둔 친구들을 대상으로 지금 있는 교회 내에서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받도록 도왔습니다. 그때 졸업한 친구들은 지금 전국 여기저기에서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자기 삶을 꾸려나가고 있어요. 그 중에는 음악하는 친구들도 있어서 교회 내에 방송국과 팟캐스트를 만들기도 했고 아이들과 카페를 2년 동안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만들었던 팟캐스트가 전국에서 엄청 잘나가 유명세를 얻기도 했어요.
그리고 한국기독학생연합이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5년째 청소년을 대상으로 상담과 다양한 일들을 해왔고, 고양교육지원청에서 학교폭력심의위원으로 관련 아이들을 5년째 만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고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 내에서 자립준비청년들을 위한 TF팀을 꾸리고 있습니다. 2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청소년과 청년이라는 단어가 제 삶에서 단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특별한 계획이 없어도 생일날이 되면 그때 만났던 친구들 100여 명이 다양한 호칭으로 선물과 연락, 인사를 줍니다. 저에게는 종교도 직업도 피부색도 전부 다른 친구들과 이웃들이 감사하게도 많습니다. 제가 도왔던 사람들 중에는 잘된 친구들이 많이 있어서 그런 친구들을 보면, 저의 존재와 삶에 대해 다시 떠올려 봅니다. 물론 좋지 못했던, 슬펐던 기억도 있지만 저에게는 즐겁고 행복한 기억들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전국 어느 곳을 가거나, 해외를 나가면 나를 반기거나 내가 초대하고 싶은 친구들과 이웃들이 어디에나 있는데 저에게는 이게 가장 큰 자산이자 자랑거리입니다.
아! 제가 목사라고 이야기했던가요? 저에게 종교나 전도라는 개념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인간들이 서로의 삶이 행복할 수 있도록 건강하게 돕고 의지할 수 있는 상황 속에 담겨있다 생각합니다. 비록 넉넉하지 않지만 다행히 지금까지 목사로서, 아버지로서, 친구로서 저는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있습니다.

청소년들과 교회 내 방송국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
청소년들과 교회 내 방송국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

학교폭력 심의위원회로 활동하게 된 계기와 느낀 점은.

제 딸이 초등학교 때 학교폭력을 당한 적이 있어요. 그 폭력을 가한 친구를 만났는데 너무 어렵고 쉽지 않은 환경의 친구였습니다. 저는 자식들과 편지와 대화를 많이 나누는 편인데 결국 딸아이의 용서와 용기 덕분에 그 친구를 만나 용서하고 선물을 전해줬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부터였습니다. 자녀가 다니는 학교의 학교폭력 자체심의위원을 하다가, 교육청 학교폭력 심의위원을 하게 됐어요. 이를 계기로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청소년활동을 다 했습니다. 심지어 녹색어머니회조차 오랜 시간 했는데, 그 때마다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저라는 존재가 과연 괜찮은 사람인지를 먼저 떠올렸고, 청소년과 젊은 친구들에게 그저 먼저 산 사람으로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요즘의 청소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무얼까요.

요즘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건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합니다. 친구라고 부르고 싶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친구라는 단어를 그저 연령대가 비슷한 관계를 떠올리기도 하고, 요즘 청소년들은 친구라면 그 관계에 걸맞는 노력과 행위를 해야 할 것 같아 부담감을 느낀다 하여 ‘좋은 파트너’라는 단어를 떠올려봤어요.
가족, 친구, 동료 등 누구나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크게는 아니어도 청소년들과 교류할 수 있는, 서로가 서로에게 안전그물망이 될 수 있는 동료들이 필요하다 봐요. 요즘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청소년들이 분명 어디선가 내말을 들어줄 동료들이, 나를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다고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해외에서 체류한 경험이 있는 걸로 아는데, 주로 무엇을 했고 무엇을 느꼈나요.

대학에서 신학을 배웠지만 저에게는 열정만 있었지 스스로의 신앙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느껴 11년 동안 목사안수를 받지 않았어요. 스스로에게 여러모로 부족함을 느꼈기에 신앙활동보다는 청소년 활동을 주로 했습니다. 30대에 캐나다를 여행한 적 있는데, 당시 전도사였던 저에게 한 외국인이 길에서 저에게 전도를 시도했어요. 속으로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분의 직업은 인근 대학의 언어학 교수였는데 주말시간에 봉사활동처럼 개인전도를 나와 저를 만나게 된 거였어요. 그 기회가 연이 돼 그분이 다니는 교회를 다니고 집에 눌러 앉게 됐습니다. 그 때까지도 제가 한국의 전도사라는 걸 밝히지 않은 채로 여러 수업도 듣고 언어도 배우며, 마약중독자거리 안에 있는 갱생센터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나와 다른 전 세계의 친구들이 그 곳에 모였는데, 친구들을 보며 공통적으로 느꼈던 점은 집이 잘 살고 못 살고에 상관없이, 어떤 문화권의, 어떤 피부색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마음의 가난과 짐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서는 어린 친구들에게 물질적, 현실적 도움을 주기위해 애썼다면, 해외에서는 곁에 서서 같은 친구가 되기 위해 애를 많이 썼습니다. 이 때 받은 영감과 용기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와 능곡에서 2005년부터 청소년 활동을 해왔고 목사훈련도 받으며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지역 내 청소년들과 함께 활동하며 무엇을 배웠나요.

만나는 아이들에게 저마다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걱정인 게 요즘 아이들이 삶에 대한 의욕이 무척 떨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우울이나 자살 등은 저희 어린 시절에서는 무척이나 크고 어려운 단어였는데 요즘 친구들은 자기 삶을 그만두고 싶다 라는 말을 예전에 비해 쉽게 하는 것 같아 들을 때마다 걱정이 큽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의 문턱이 너무 낮아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생각과 감정표현이 과거에 비해 솔직해졌다는 장점이, 반대로 힘들고 어려워졌을 때에는 서슴없이 죽음을 언급할 수 있다는 단점과 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많은 것을 해주고 싶고 동시에 많은 활동을 해왔지만, 결국 저는 아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라는 점을 자주 느낍니다. 결국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좀 더 세심하게 응원하고 지지해야 하지 않았나를 배우게 됩니다.
 

상담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의 모습
상담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의 모습

청소년들과 동네의 주민들은 서로를 위해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요.

저는 청소년과 어른을 나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또한 도움이라는 단어를 쓰는 걸 선호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어른들은 절박한 환경과 불우한 사회를 통해 청소년 시절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하며 너무 빨리 어른이 됐습니다. 청소년 시절을 건너뛰고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서일까요? 지금의 어른들은 청소년들과 무엇을 말하고 어찌 지내야하는지를 잘 모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자녀들, 요즘의 청소년들과 꼭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서로 동등한 친구나 동료가 될 수 있다는 감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회의 어느 세대도 마찬가지겠지만 환대 받았던 청소년시절의 기억과 내 곁을 지키는 친구들의 온기와 우정이 많지 않다는 게 큰 문제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어른, 청소년 구분 없이 서로가 친구가 되기 위해, 좋은 파트너, 동료가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 지역에서 어떤 일들을 해보고 싶나요.

혹시 고양시에 좋은 공동체가 있다면 합류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더 많은 동료를 원합니다. 저는 어렸을 적 배트맨 영화를 보면 젊고 멋진 배트맨보다는 그 곁을 지켰던 집사의 존재에 열광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청소년들, 어려운 사람들 곁에서 함께 있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비록 교회에 소속되어 있고 목사지만, 교회가 아니어도 목사가 아니어도 좋으니, 제 권위와 직위에 상관없이 청소년을 위한 보편적인 일을 하고 싶습니다. 동료 종교인들은 저의 이런 말을 싫어하지만 저는 목자가 아닙니다. 양입니다. 양이고 싶습니다. 동료양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일하며 곁에서 살고 싶습니다. 청소년들이 만약 내게 도움을 요청하면 주일과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제 하나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이들을 만나러 갈 겁니다.


죽기 직전 사람들에게 남길 부고를 떠올려보세요.

저는 죽음을 자각할 때마다 나의 아이들과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문장을 수첩 등에 따로 정리해 남기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갔던 모든 시간 속에서 나의 선택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가족들에게 좋은 구성원이 아닐 수도 있고, 교단에서는 좋은 목사가 아닐 수도 있지만, 내가 나로 태어났다는 감사함, 지금 나의 존재와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감사함, 누군가 힘들고 어려울 때 곁에 함께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함 등 내 삶에는 감사함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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