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을 돌보는 월요시민강좌> 이영준 (사)한국산악회 학술문헌위원장
북한산의 자연과 역사, 사람
[고양신문] <몸과 마음을 돌보는 월요시민강좌. 5월 강좌는 북한산이 주제였다. 북한산을 놀이터 삼아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산악인의 삶을 살게 된 이영준 (사)한국산악회 학술문헌위원장이 강사로 나서 북한산의 이모저모를 재밌게 들려주었다. 강의는 북한산의 자연과 역사를 가볍게 훑고, 북한산 초기 등반사에 집중되었다. 북한산과 등산에 대한 오랜 학술연구를 통해 얻은 다양한 저술과 기록이 강의 내내 흥미를 끌었다. 강의를 듣고 나니 북한산을 좋아만 했지, 너무 무심했구나 싶었다. 선비의 도포를 벗어던진 채 목숨 걸고 백운대에 오른 선인들의 등산이야기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른거리고, 북한산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오늘이 황송하게 다가왔다.
■북한산의 자연과 역사
식물깃대종은 산개나리, ‘미스김라일락’ ‘능수벚나무’ 원산지
북한산은 12억 년 전 땅속의 마그마가 서서히 굳어 생긴 화강암 산이다. 약 10억 년 동안 1만 미터에 달하는 풍화 침식작용이 일어나면서 봉우리와 골짜기가 형성됐다. 풍화와 침식은 서서히 진행돼 2000만년 후에는 산의 모습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한다.
조선말,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북한산은 숲이 우거진 산이 아니었다. 1946년 한국산악회를 중심으로 북한산 나무심기운동을 펼쳤고, 이후 이 운동은 78년 동안 이어져 북한산 숲을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북한산에는 현재 13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북한산을 대표하는 식물은 ‘미스김 라일락’과 ‘능수벚나무’다. 미스김 라일락은 북한산이 원산지로 기록돼 있다. 1947년 미군정 식물학자 엘윈 미더가 북한산 백운대 인근에서 채집해 미국으로 가져가 번식에 성공했다. ‘미스김 라일락’이란 이름은 그냥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학명으로 정해졌는데, 이 학명은 미군정 당시 엘윈 미더의 사무실에서 일했던 여직원을 부르는 이름, 미스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능수벚나무는 조선 영조 때 문신 홍양호에 의해 발견됐다. 북한산 우이동 인근에서 처음 발견돼 북한산 우이동이 원산지이다. 조선 때는 활을 만드는 소재로 활용되었다. 북한산 식물생태계를 상징하는 깃대종은 산개나리다. 북한산에서 최초로 발견된 산개나리는 자생지가 드물다. 북한산에서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숨은벽 능선 등 곳곳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들이 남아있다.
동물깃대종은 오색딱따구리, 멧돼지 개 고양이 급증
북한산의 동물 깃대종은 오색딱따구리다. 참나무가 많은 북한산 전역에서 서식하고 있다. 오색딱따구리는 국내 곳곳의 숲에서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숲의 건강도를 나타내는 생태환경 지표종으로 ‘숲속의 의사’로 불린다. 북한산에 많이 서식하는 동물 중 하나는 멧돼지다. 아프리카 돼지열병 이후 개체수가 많이 늘어나 ㎢당 2.1마리가 서식하고 있다. 전국 평균 서식밀도(㎢당 1.1마리)에 비교해 꽤 높은 편이다. 북한산은 도심지로 둘러싸인 위치적 특성상 개와 고양이도 많이 살고 있다. 은평지구 삼송지구 등 북한산 인근지역에서 도시개발이 진행될 때마다 버려진 개와 고양이들이 북한산을 서식처로 삼고 있다. 개와 고양이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동물생태계가 교란되는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북한산 생태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동물군은 역시 호모사피엔스, 사람이다.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사람들(1995년 500만명)이 찾는 산으로 기네스북에도 오른 북한산은 기록을 연신 깨고 있다. 최근 북한산을 찾는 인구는 연간 800만명이다.
암봉 사이를 둘러싼 북한산성 12.7㎞ 대부분 고양시 구간
북한산은 삼국의 각축장이었다.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와 고구려 지명 천정구가 새겨진 사기막골 비석,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인수봉 석불 등 각 시대를 상징하는 유물들이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비봉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 진흥왕 때 영토확장을 천명하는 내용을 담은 비석이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555년에 북한산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담겨있다. 진흥왕 순수비는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비석을 판독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북한산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은 북한산성이다. 북한산 중턱부터 산봉우리를 넘나들며 축성된 북한산성은 전체 길이가 12.7㎞에 이른다. 이 중 고양시 구간은 73%로 북한산성이 위치한 구간은 대부분 고양시에 속한다. 국내 산성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축성된 북한산성은 지형지물을 잘 활용했다. 만경대 원효봉 의상봉 등 주요 봉우리를 연결하는 암릉구간에서는 암릉 자체를 자연성곽으로 삼았고 계곡 주변의 바위를 다듬어 거대한 돌성을 쌓았다. 북한산성의 대문 역할인 주문은 본래 대성문이었으나 숙종이 대서문을 거쳐 북한산에 오르면서 대서문이 주문 역할을 하게 됐다. 대서문이 주문이 되면서 대서문을 주변으로 북한동 마을이 생겨나게 됐다. 병자호란 이후 숙종 37년(1711년) 6개월 만에 축성된 북한산성과 주변에는 13개 성문과 행궁, 유영지(3곳), 군창, 다수의 승영사찰이 설치됐다. 숙종은 전쟁이 일어나면 왕뿐만 아니라 한양백성들과 함께 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로 북한산성을 축성했다고 하나, 실제 전쟁으로 인한 피신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 북한산의 사람
옷과 깃, 신, 버선을 벗고
손발을 끌 박듯 틈 속에 넣고 기어서 나아갔다
한반도의 중심에 솟은 북한산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품고 있다. 맨몸으로 암벽을 오른 북한산 초기 등반가들의 이야기를 책과 신문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기록의 대부분은 조선시대부터 시작되지만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비봉 꼭대기에 세운 것을 보면 기록이 없다뿐이지, 북한산에 담긴 사람의 역사는 헤아릴 수 없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북한산에 담긴 사람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삼연 김창흡의 청담동부기(1870년)
김창흡은 북한산 사기막골 청담동계곡에 올라 시와 같은 아름다운 기록을 남겼다. 사기막골 중상류에 있는 청담동 계곡은 1968년 김신조 침투사태를 계기로 군부대가 주둔한 후로 개방되지 않고 있다. 북한산 비경 중 으뜸이라고 알려진 청담동 인근엔 국내 대기업이 사들인 사유지도 꽤 넓게 분포돼 있다. 청담동 계곡엔 ‘청담동’이라 새긴 바위가 있는데, 이 글씨는 구봉 송익필 선생이 썼다고 한다. 김창흡의 청담동부기를 보면 인수봉에서 발원된 청담동계곡의 아름다움과 등산의 묘미가 잘 표현돼 있다.
“청담일구는 화산 북쪽에 있고, 도성에서 40리 떨어져 있다. 화산은 나라의 진산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삼각산인데, 가장 크고 뛰어나며 우뚝 솟은 것이 인수봉으로 치동 동남쪽에 있다. 온 골짜기의 맑고 깨끗한 기운이 사실 여기에서 비롯된다. 매끄럽고 깨끗해 흰 옥을 쌓아놓은 듯, 눈과 서리가 덮여있는 듯하며 물이 흘러 그 가운데 이르면 흰 비단을 펼쳐놓은 듯하고 빙빙 돌면서 떨어지면 아래층에서는 쟁쟁 옥소리가 난다. 진실로 노쇠하여 침상에 넘어져 있지 않거든 남여를 타거나 지팡이를 짚고 흥을 따라 오리라.” - 와운루계창 중
박문호의 유백운대기(1882년)
고종 19년(1882년) 음력 3월 초하루, 경모 박문호는 친구인 택당 김택영(우림), 매천 황현(운경)과 함께 삼각산에 오른 기록을 남겼다. 이들은 평창동 자하문을 거쳐 대남문, 중흥사, 산영루를 지나 근처 민가에서 자고 용암사에서 나무꾼을 만나 본격적인 등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거추장스러운 양반의 차림을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오른 백운대 등산기가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한국 암벽등반의 시초가 아닐까 싶다.
“바야흐로 백운대를 오르는데 나무꾼이 앞에 서고 우림이 그 다음에, 내가 또 그담에 서고, 운경이 맨 뒤에 섰다. 중간에 이르니 가장 험한 곳이다. 세속에서 결단암이라고 부르니 올라가는 자와 못 오르는 자가 이곳에서 결정된다. 이윽고 옷과 깃, 신, 버선을 벗고 손발을 끌을 박듯 틈 속에 넣고 기어서 나아갔다.” - 박문호의 유백운대기 중
신기선의 유북한산기(1898년)
1898년 쓰여진 신기선의 유북한산기에는 인수봉을 오른 영남 김씨 이야기가 담겨있다. 장비도 없던 그 시절, 어떻게 홀로 인수봉을 올랐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영남 김씨’라는 것 외에는 등반 주인공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지만, 인수봉 등반에 대한 한국인 최초의 기록이다.
“순검에게 물으니 영남에 사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홀로 인수봉을 오른 후에 붉은 깃발을 꽂았다고 한다. 몸이 날래 잡을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신기선의 유북한산기 중
경기중 4학년 강상규군의 등산기록(1941년)
일제강점기였던 1941년, 경기도 경찰국에 경기중학교 4학년 강상규군이 연행됐다. 강상규군이 연행된 이유는 북한산 등반 기록을 담은 일기 때문이었다. 일기에는 1939년 4월 11일 북악산, 6월 11일 비봉, 9월 10일 백운대, 9월 17일 문수암, 1940년 4월 14일 백운대에 오른 기록이 있었다. 강군은 등산할 때 5만분의 1의 지도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당시 경찰국은 이 지도와 등반 목적에 대해 예민하게 캐물었다고 한다. 강상규군은 영화 ‘민족의 제전’에서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가 우승했을 때 일장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라 없는 비애를 느꼈고, 그 때부터 목숨을 바쳐 나라를 독립시키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경찰국 관계자가 등산 이유를 묻자 강상규 학생은 아래와 같이 답변했다. 경찰국은 강상규 학생을 ‘조선독립을 열망하는 불량학생’으로 검거했고 징역 2년 형을 내렸다.
“북한산의 지도에 붉은 연필로 표를 하고 있는 대로 그 지도를 사용해서 등산하였다. 등산의 이유는 장래 조선독립을 위해 혁명전쟁의 군사를 일으키려고 계획하고 있는 나로서는 경성 부근의 지리에 정통하는 일은 전략, 기타의 점에서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에(중략) 북한산 등은 경성 가까이의 연속된 산줄기로서 군사상으로 보아도 수도 경성에 대한 상당한 요새지로 장래에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더욱이 하루로 자유로이 갔다올 수가 있는 곳이고 또한 장래 혁명전쟁에 나서는 데는 신체도 마음도 함께 크게 단련해 놓을 필요가 있다고 통감하였다.” - 식민지 불온열전 중
매일신보 주최의 첫 북한산 단체 등반(1917년)
북한산 단체 등반에 대한 기록도 있다. 1917년 4월 24일자 매일신보에는 ‘백운대하의 행락, 본사 주최 북한산 등산회’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는 22일 일요일 등산회가 열렸고, 이날의 날씨는 ‘청신한 기운이 두 뺨을 어루만지는’ 등산하기에 좋은 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전 7시30분경 독립문 앞에 일천여명이 등산을 위해 모였는데, 조선인 참가자는 혈기왕성한 학생이 많았고, 일본인 참가자 중에는 부인과 자녀를 동반한 사람들이 이었다고 한다. 일제는 북한산 백운대까지 등산로를 만들고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등 북한산 등산을 대중화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고, 북한산 자락에 호텔과 풀, 식당을 만들고 유원지화 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날 단체등산은 북한산 등산의 대중화를 선언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북한산성을 답파하야 하로의 일요일을 장쾌히 놀고 다리상 력사상의 지식을 엇고자하난 뜻으로 계획된 본사 쥬최의 북한산 등반회난 예정과갖치 이십이일 일요에 거횡되얏다. 이날은 등산하기에난 이죠맛침 일긔이라 아침안개난 거치락 말략하고 청신한 듸운은 두빰을 어르만지난 오전일곱시반경이 됨애 아래거에 참가코자하야 독립문 앞에 모여드난 사람이 일천여명이라 본사긔를 중심삼고 모혀잇난 참가자들 중 죠선인은 혈긔방상한 학생제군이 만코 일본인즁에난 동부인에 십이삼세가량쯤 되어보이난 자녀까지 동한 사람이 잇더라. - 매일신보(1017년 4월 24일자)
이영준 (사)한국산악회 학술문헌위원장은 강연 마무리에 백운산장 이야기를 꺼냈다. 1924년 황해도 해주사람 이해문씨가 살았던 백운대 아래 토굴에서 시작된 백운산장의 역사는 올해 100년에 이른다. 대한민국국립공원 산장 1호이기도 하다. 이해문씨의 아들 이남수씨, 이남수씨의 아들 이영구씨가 대를 이어 지켜온 백운산장은 우여곡절 끝에 2019년 국가에 귀속됐다.
이영준 위원장은 백운산장은 고양시에 있는 가장 오래된 근대건축물 중 하나이기도 하고, 한국 등산역사의 상징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고양시에서 나서서 보존하고 기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9년 국가귀속과 더불어 철거 위기에 처했던 백운산장은 산악인들의 반대운동으로 철거는 면할 수 있었지만, 현재 문을 굳게 닫은 채 외로이 산을 지키고 있다. 이영준 위원장은 북한산과, 산악인들과 100년을 동고동락해온 백운산장이 다시 활기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길을 같이 찾아보자고 제안하며 강의를 마쳤다.
발행인 이영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