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표 시집 『사랑하냐고 묻고 그립다고 대답했다』
등단 40년 만에 발표한 세 번째 시집
“약자들을 찍는, 삶이라는 거리의 사진사”
목말랐던 독자들에게 ‘시 읽는 행복’ 선물
[고양신문] 지난 봄 발간된 시집 한 권이 잔잔한 감동을 전하며 ‘시’에 목말랐던 독자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사랑하냐고 묻고 그립다고 대답했다』(달아실 刊)는 등단 40년을 맞은 이능표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이능표 시인은 1984년 『문예중앙』 시인추천을 통해 등단했다. 당시는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구체적으로 ‘문학과지성’과 ‘창작과비평’의 양대 구도가 선명했던 시절이었는데, 이 시인은 문지를 대표하는 평론가 김현과 창비를 대표하는 시인 신경림의 공동추천을 받았다. 특히 신경림 시인으로부터는 정지용의 재능에 빗대어 “날씬하기는 그 윗길 한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구성이 완벽하면서도 노래적 성격을 잃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서울예대를 다니며 정현종, 신대철, 오규원 등 순수문학의 본령을 지키는 쟁쟁한 스승들에게 배움을 얻었으면서도 진영의 울타리를 가뿐히 넘나들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높은 기대를 받았지만, 시인으로서의 행보는 느릿했다. 1988년 첫 시집 『이상한 나라』를 발표한 후 27년이 지나서야 두 번째 시집 『슬픈 암살』이 묶였고, 또다시 9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린 끝에 이번 시집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작(寡作)이라고 해서 시적 성취마저 게으른 것은 아니었다. 대기업에서의 직장생활, 출판사(민미디어, 문이재) 경영 등 오랜 시간 생업에 매달리면서도 그 스스로 “시인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잊은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가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지 않고 살아낸 긴 시간들이 밀도 높은 시어로 시집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됐는데, 전반부에는 스스로의 내면으로 향하는 시인의 시선을 만날 수 있다. 시인의 눈은 무엇을 보는가, 시는 어떤 순간에 찾아오는가에 대한 깊고도 내밀한 성찰들이 담겼다. 시집 첫머리에 실린 「춘천 가는 길」에서 시인은 ‘장의차를 보고 속도를 줄이’고 ‘들꽃을 보고 걸음을 멈춘’다. 또한 오랫동안 가족과 함께 한 반려견과 이별하며 ‘개를 묻는 건 추억을 묻는 것’(「복숭아나무 그늘에」)이라고 되뇌인다. 이처럼 한 생이 피어나고 저무는 모든 순간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는 시인의 태도는 시집 전체를 따뜻하게 관통한다.
그런가 하면 ‘박새 앉았던 자리에 몇 개의 우주가 머물다 갔다’(「박새 앉았던 자리」)는 것과 ‘가끔은 별난 이유로 별이 되기도 한다’(「우리가 별이 될 때」)는 것과 ‘그 모든 1초와 1초 사이의 1초’(「1초」)에 운명을 가르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시인의 눈이 아니면 눈치채지 못하는 비밀들을 놓치지 않고 언어로 잡아둔다.
반면 후반부에는 시인의 시선이 가족과 이웃들에게로 향한 시들이 많이 등장한다. 시인만의 작은 공간이 있는 파주 갈현리 들판 논두렁에 ‘ㄱ자로 서 있는 사내’(「갈현리」)가 ‘겨우내 자음과 모음으로 있다 갔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성공한 사회주의자가 되어 나타난 한 어미의 아들’(「갈현리 베이징 김」)과 반갑게 조우하고, 좋은 이웃이었던 독거노인이 뒤늦게 나타난 아들들에 의해 ‘생전 보기 힘든 성대한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208호」) 마침내 불쾌한 이웃이 되는 과정을 쓸쓸하게 그려낸다. 시집 발문을 쓴 황인숙 시인의 “이능표 시인은 삶이라는 거리의 사진사다. 그 사진사는 약자, 패자, 소위 ‘투명인간’으로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 비참한 사람, 외로운 사람들을 포착해서 찰칵찰칵 찍는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처럼 마음의 안과 밖 풍경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시들은 시 읽기의 다채로운 즐거움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그중에서도 기자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시들은 일상에서 만난 타인의 모습과 가족에 대한 기억들이 연결되는 시들이다. 시장통에서 「닭 모가지를 치는 여자」의 모습에서 가족을 먹이기 위해 힘겹게 닭을 잡는 어머니를 보기도 하고, 허겁지겁 「국밥 한 그릇」을 무전취식하는 사내에게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경성 밤거리를 헤매’었다는 아버지의 회고를 떠올리기도 한다.
앞의 시들이 현재가 과거를 호출했다면, 반대로 「닭 다리를 든 소년」은 거꾸로 과거의 먼 기억이 뒤늦게 현재의 깨달음으로 찾아오는 시다. 청년시절 통닭집에서 마주친, 손님 접시에서 닭 다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은 신문팔이 소년의 모습은 오랫동안 시인의 기억 한구석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반백을 넘기고서야 비로소 그 소년이 누구이지 깨닫는다’고 고백한다. 시인 자신의 인생이 바로 내 것이 아닌, 타인의 식탁 주변을 배회하며 닭 다리를 집었다 내려놓듯 무정한 세월을 그렇게 흘려보냈다는 것. 객관적으로는 남부럽잖은 성취를 이뤘건만, 직장도 사업도 시인에게는 본질적으로 ‘타인 식탁의 닭 다리’였다는 고백이다.
시인으로서의 오롯한 자의식은 「의자」라는 시에서도 선명히 드러난다. 시인은 낡은 의자를 바꿀까 생각하다가 ‘시인의 의자는 한 개뿐’이라 하셨던 옛 선생님들을 떠올리며 ‘그럭 저럭 고쳐쓰는 게 좋을 듯’하다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그럴듯한 남의 목소리가 아닌, 유일무이한 내 자리, 내 목소리를 평생 지키는 존재가 시인이라는 뜻이다.
이능표 시인은 40년째 고양에 살고 있는 오랜 이웃이기도 하다. 80년대 중반 스승이었던 최인훈 소설가의 주례로 대학동기인 아내와 결혼해 맨 처음 능곡 토당동에 신혼집을 차린 후, 주교동과 성사동을 거쳐 2000년대 중반 대장동에 작은 정원이 있는 주택을 지었다. 시인은 「집과 집 사이에 헌 집을 지었다」는 시에서 이 집을 ‘땅 속 깊은 곳 새집에 들기까지’ 잠시 머무르는 ‘내 생에 마지막 집이려니 생각했다’고 말한다. 출판사를 경영하던 시절에는 고양 땅 역사를 집대성한 『고양시사』와 고양문화원에서 출간한 다수의 책을 편집·제작하기도 했다.
반가운 소식이 하나 더 들린다. 오랫동안 절판됐던 첫 시집이 36년 만에 재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것. 새로운 버전에는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 사이의 공백기인 1990년대 초반에 창작된 시들도 수록할 예정이라고 하니, 이능표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소중한 선물이 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