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방학

우리 주변의 교육 이야기를 쓴 지도 2년을 훌쩍 넘었습니다. 칼럼 코너 이름을 정할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송 선생의 교단 일기’, ‘사랑의 학교’ 등을 고민하다가 학교가 가장 행복할 때는 방학 전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내일은 방학’이라는 의미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교사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교사의 에너지는 방학 전날까지만 작동되도록 알람이 설정되어 있으니까요. 새로운 에너지를 얻지 못하고 다시 학기를 시작하다 보면 수업은 반복된 유창성으로, 교육은 일상의 업무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연수를 통해 새로운 길을 경험하게 되고 이는 고스란히 아이들과의 만남에 투영됩니다. 새로운 학교에서 처음 맞는 방학이 이제 2주 정도 남았습니다. 제가 선택한 공부의 공간은 충북 괴산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공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3년 전, 이곳에서 보낸 성찰의 시간을 다시 꺼내봅니다. 

충북 괴산의 '산막이 옛길'에서 조망되는 풍경. 
충북 괴산의 '산막이 옛길'에서 조망되는 풍경. 

8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선배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대학 시절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 이른바 ‘나쁜 선배’였습니다. 그 선배 덕분에 농촌 봉사활동을 가게 되었고 방학이 되면 주변의 청소년들을 모아 작은 실험 학교인 ‘빵점 학교’도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버스가 끊겨 자취방 문을 두드리면 싫은 내색 없이 자신의 이불을 내어주고 속 쓰릴까 보글보글 김치찌개에 반숙의 계란후라이를 올린 고봉밥을 차려주고 수업에 들어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보낸 전화와 문자에 8년간 대답 없는 선배가 밉고 야속했습니다.

수화기 너머 첫 마디는 마치 어제 통화한 사람 같았습니다. 
“어~ 왜 이리 늦게 받아! 선배가 전화했는데 한 번에 딱 안 받는구만. 허허”
“형~ 형~ 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왜? 보고 싶었나?” 
“아! 도대체 어디에요? 어디 살아요? 왜 전화는 안 받았어요. 어디 아팠던 거에요?”
“야, 한 번에 하나씩만 물어봐야 이야기를 하지… 허허, 지금 충북 괴산에 있어. 너 방학이지? 시간 되면 내려와라. 만나서 이야기하자.”

내려가는 길, 산과 계곡이 전부라고 하는 충북 괴산의 풍경이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3시간이 넘는 거리를 한 번의 쉼도 없이 달려갔습니다.

만나기로 한 마을 사랑방 같은 식당에 선배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윗 층에 방 하나 잡아 놓았으니까 일단 짐 놓고 내려와. 메뉴는 형이 알아서 시켰다.”

빈속에 들어간 소주 한잔과 함께 시작된 이야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8년 전 선배의 둘째가 많이 아팠습니다. 전국에 있는 유명하다고 하는 대학병원과 한의원을 모두 다녔지만 좋아지지 않았고 아이의 곁을 한시도 떠날 수 없는 상황인지라 선배는 생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왕복 4차선 도로에서 쓰러져 버린 아이를 아파트 베란다 너머에서 확인하고 달려가던 순간을 이야기할 때는 형도 울고, 저도 울었습니다. 그저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확인했던 날, 형은 결심했다고 합니다. 아픈 둘째가 학교라는 공간에서만이라도 편안해질 수 있도록 시골의 중학교를 알아보았다고 하더군요.

우연히 소개받은 충북 괴산의 한 중학교를 방문하게 되었고 전교생이 20명밖에 안 되는 작은 시골 중학교는 구성원 모두가 첫날부터 아이를 같은 식구로 품어 주었다고 합니다. 

“전학 첫날에 아이를 전교생 단톡방에 초대하더니 그날 저녁 바로 축구 같이 하자는 메시지가 왔어. 언제 증세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나가길 원했고, 돌아온 아이의 표정은 참 편안해 보였어. 다음 날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는데,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아이의 증세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데, 괜찮겠냐고? 그게 이곳에서의 첫 경험이었어.”

자신과 둘째만 2년 전에 내려왔고, 지금은 아내와 첫째도 함께 내려와 살고 있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선배의 입은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5년 만에 걸려온 통화 마지막에 선배는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원석아~ 그동안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했다. 그런데, 그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랬다. 지금은 숨을 쉬고 있거든. 그래서 전화했다.”

송원석 일산양일중 교사
송원석 일산양일중 교사

숙소에 올라와 새벽까지 술자리는 계속되었고 우리는 그 옛날 선배의 자취방에 같이 몸을 누이던 그때처럼 나란히 이불을 덮고 수면 상태로 넘어가기 직전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의 마음은 이미 그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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