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김범수 자치도시연구소 소장
[고양신문] 6월의 어느 날 아침 8시 30분경 좀 늦게 출근하다가 마을 앞 도로 횡단보도로 걸어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생으로 보이는 두 남자 어린아이들이 계단에서 내려오며 한 아이가 무엇인가를 계단아래로 던졌다. 신발주머니였다. 나는 어린이들에게 무어라 말할까 하다가 쳐다보니, 스스로 자제하는 듯 싶어서 이내 말은 하지 않았다.
나와 두 어린아이들은 횡단보도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길 기다리며 인도변에 함께 섰다. 녹색등이 켜지자 한 아이가 신발주머니를 횡단보도 앞으로 던졌다. 나는 어린아이들을 쳐다보며 “그렇게 하면 안되지”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왜 막지. 요즘 아저씨들은 이상해.” 나는 당황했고, 그 다음에는 기분이 상했다. 그 어린이는 계속 내 뒤에서 걸어오며 나에게 들으라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요즘 아저씨들은 이상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왜 막지...”
어린이를 위해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이들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마을 주민들이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도와주고, 민주 시민으로, 교양을 갖춘 사회인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라 생각해 보았다. 신발 주머니를 계단과 횡단보도에 던지는 행위가 큰 일탈은 아닐 것이다. 재미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문제가 되는 지점은 어린이들의 작은 일탈 행위에 대하여 마을의 연장자가 한마디 권고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현상이다. 어린이와 청소년 등이 과거보다 성숙하다. 그러나 어린이건 어른이건 일탈행위에 대해서는 서로 권고해주는 모습이 진정한 마을이라 생각한다.
개인주의는 철학적으로 자유주의에 기원한다. 현대 자유주의 철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존 스타우트 밀(1806~1873)은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를 이롭기 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밀은 개인의 자유 한계도 말했다. 타인에게 해가 될 때에는 개인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위해의 원칙(harm principle)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신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사회는 그 행동을 제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주의가 공동체와 타인에 대한 배려를 고려하지 않는 상황, 내가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유해하다. 마을에서 살다보면 어린이들의 작은 일탈을 마주친다. 우리 아파트는 고봉산 기슭에 있어 주민들의 초등 자녀들은 안곡초등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런데 아파트 담장을 넘어가면 지름길이라 가끔 초등생들이 학교를 가기 위해 길로 가지 않고 아파트 담장을 넘어 산길로 가는 경우를 몇 년 전에 자주 보았다. 나는 몇 번은 그냥 지나치다가, 자주 넘는 어린이를 보면 “다음에는 담을 넘어 다니지 않으면 좋겠네”라고 부드럽게 주의를 주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네”하고 넘어 간다. 몇 번 내가 이야기하자, 아파트 담장을 넘는 아이들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5년 전으로 기억되는데, 또 한번은 출근을 위해 인도를 걸어오는데, 큰 도로 사거리의 고봉산으로 올라가는 길 벤치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학교를 가기 전에 끽연하고 가는 것 같았다. 나는 “이곳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되지요”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고등학생들은 “네”했다. 그 이후 몇 번 담배를 피우는 고등학생들이 목격되었다. 내가 사실 확인한 결과 고봉산 인근은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공원에서는 흡연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름 불법이라는 점을 강조해 몇 번 주의를 주었다. 그 이후 사거리 벤치에서 흡연하는 고등학생 모습은 사라졌다.
공동체는 좋은 규범을 형성하기 위해 모두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민주적으로 좋은 규범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웃과의 교류가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나와 다른 사람과의 대화와 소통, 서로 다른 가치관과 규범에 대한 의견의 상호 비교와 대화가 그것이다. 대화를 통해 개인주의는 절제하고, 상호 신뢰, 호혜성(reciprocity)과 같은 사회적 자본을 형성할 수 있다. 공동체의 좋은 규범이 경제와 민주주의를 발전시킨다는 것이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푸트넘의 사회자본 이론이다.
학부모들에게 동의를 요청드린다. 자녀들이 자신의 재미만을 위해 길거리에서 신발주머니를 던지며 노는 것에 대해 마을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주의를 줄 수 있도록 허용해 주세요. 초등학생이 빨리 학교를 가기 위해 아파트 담장을 넘어 다니는 일에 대해서도, 마을의 주민이 주의를 줄 수 있도록 동의해 주세요. 고등학생이 공원에서 담배 피울 때, 동네 주민들이 주의를 주는 것에 부모님들 동의해 주세요.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크고 작은 일탈을 마주한 마을의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말로 주의를 줄 수 있도록. 그렇게 된다면, 동네 주민들은 동네 어린이들의 훌륭한 선생님, 보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아들과 딸이 마을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어른들은 “그래”라고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는 마을을 소망한다. 어린이와 주민들이 소통하는 마을, 그래서 좋은 규범을 만들고 배워가는 마을 공동체가 고양시의 덕양, 일산에 만개하길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