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구 장발장은행 2대 은행장
9년동안 24억 대출, 무이자 최대 300만원
벌금 못내고 노역형 사는 이들에 대출
소득차등벌금 등 제도개선에도 힘쓸 것
[고양신문] “지원 숫자가 줄어들지 않아요. 작년에도 200명 정도에게 대출을 해주었습니다. 2015년부터 9년 동안 1369명에게 24억원 정도를 대출해줬네요. 사연을 듣고, 대출심사를 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 많습니다.”
정범구 전 독일 대사가 장발장은행 2대 은행장이 됐다. 고 홍세화 선생이 1대 은행장이었던 장발장은행은 벌금형을 받고도 낼 돈이 없어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들 중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곳이다. 지난 4월 별세한 홍 전 은행장의 자리를 정 전 대사가 7월 8일부터 이어받았다.
장발장은행은 개인, 단체의 기부로 운영되며 지원대상은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생계곤란 등의 이유로 벌금을 내지 못할 형편에 있거나 벌금 미납으로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 중 소년소녀가장, 미성년자,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차상위 계층이 우선 심사대상이다. 신청자들 중 심의를 거쳐 최대 300만원까지 지원한다. 이자는 없고, 3개월 거치, 1년 균등상환 방식이다.
매년 200명 정도가 지원을 받고 있다. 2015년 9월 문을 연 이후 24억원 정도를 지원했는데 이중 17억원이 시민성금이었고, 나머지는 대출 상환금이었다. 889명이 7억8000만원가량 상환했다. 전액 상환을 한 경우도 30%가 넘는다. 공공이나 기업 성금은 거의 받지 않는다. 대부분 1만원 내외의 소액성금. 한 사람이 1억5100만원을 낸 경우가 있기는 한데 매우 특이하다. 처음 10만원으로 시작해 10만원씩 올려서 500만원까지 냈다가 다시 10만원씩 내려서 기부를 했다. 끝까지 본인을 공개하지 않았다.
대출 심사는 매월 1회 열린다. 김학성 전 법무부 교정본부장, 김희수 변호사,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민갑룡 전 경찰청장,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양상우 전 한겨레 대표이사,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이동우 민변 복지재생위원장,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이 대출 심사위원이다.
정범구 은행장은 심사 때 사연을 검토하는 게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홀어머니와 사는 20대 후반 남성인데 어머니가 신장수술을 받아 간병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예비군 훈련 통보를 받은 거예요. 결국 훈련에 못 가서 벌금 100만원을 받았어요. 노역형을 받으면 열흘을 살아야하는 거죠. 그동안 어머니를 맡길 곳이 없는 딱한 상황이었습니다. 돈있는 사람들에게 100만~200만원은 사실 큰돈이 아니지만 가난한 이들에게는 다른 가치입니다. 기초수급자, 장애인들에게는 은행 대출은 저 먼 이야기이고, 대부분 신용도도 낮죠. 그렇게 쉽게 금용사기의 피해자가 됩니다.”
사연들을 하나씩 이야기하며 정 은행장의 눈시울이 어두워졌다. 누구에게는 지갑에서 바로 나올 수 있는 돈이 어떤 이들에게는 절망이 될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의 사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도 많고, 고통은 항상 떼로 다닌다. 잘못해서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되었다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범죄자가 되는 금융 피해 사례가 최근에는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초대 은행장이었던 홍세화 선생이 은행을 만들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면, 저는 이제 장발장은행 문을 닫기 위해 애쓰겠습니다. 단순한 벌금형일 뿐인데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징역을 살아야 하는 이런 법과 제도 자체를 없애는 것이 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범구 은행장의 취임사였다. 장발장은행이 필요없는 세상을 만든 것이 장발장은행의 창립 이유다. 대출 이외에 여러 제도 개선과 여론 만들기에도 애를 쓰고 있다. 벌금형 집행유예제도 도입, 노역형 대신 공공기관 공익근로 봉사 대체, 특히 소득에 따른 차등 벌금형까지. 독일, 오스트리아, 핀란드 등 유럽에서는 소득에 따른 차등 벌금제를 도입하고 있다. 2001년 핀란드에서 노키아 임원이 오토바이 과속 운행으로 단속에 걸려 11만6000 유로(약 1억4000만원)를 부과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속도 위반으로 8만 유로, 신호 위반으로 2만6000 유로를 낸 경우도 있는데 모두 차등형 벌금제, 일수 벌금제도가 있어서 가능했다.
“우리는 옛날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이 잘 살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더 많이, 더 잘 살기 위해 달려가지만 어디까지, 어디를 향해 달려갈지 모르겠습니다. 나 혼자 더 많이 갖기를 원하기보다는 이웃과 같이 살아보자는 것이 장발장은행의 취지이고, 저도 개인적으로 그런 일에 쓰이고 싶습니다.”
정범구 은행장은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살아야 하는 장발장들을 위해 우리 모두가 은촛대를 건네준 미리엘 주교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선택은 결국 장발장이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발장은행 02-2273-9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