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본 세상
『츄로스』(홍당무 지음. 소동)
[고양신문] “여보세요? 미화원 구한다고 해서 전화드리는데요?” “거기 청소하는 사람 구하는 곳 맞죠?”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하루에도 몇 통씩 이런 전화가 걸려왔다. “아닌데요.” “잘못 거셨습니다.” 하고 끊으면 같은 번호가 또 울린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저, 죄송한데 이 번호를 어디서 보고 연락 주신 걸까요?” 세상에, 보고 전화했다는 곳이 다 다르다. 이래서야 도대체 살 수가 있나?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겨우 알아낸 결과는 황당했다. 청소용역을 알선하는 업체인데 뒷번호가 ‘0504’가 아니라 ‘0405’인 것. 그런데 문제는 이 업체가 청소원을 구하면서 전화번호를 ‘0504’로 잘못 적은 것이다. 수소문해서 알아낸 사실을 바로 잡기 위해 업체로 전화를 걸었는데 구인광고를 여기저기 내서 도대체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 난감해한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달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화가 났다. 그렇다고 전화를 받지 않을 수는 없고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또다시 모르는 전화번호가 찍힌다. 받았다. “실례지만, 청소원을 구한다고 해서 전화했어요.” “잘못 거셨습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딱딱해지고 있었다. “아, 그래요? 이를 어쩐다. 이번엔 꼭 되어야 하는데.” 전화기 너머 난감해하는 표정이 보이는 것 같다. “저기, 잠깐만요!” 죄송하다고 하면서 끊으려 하는 분에게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했다. “아마, 뒷번호가 0405일 거예요. 거기로 걸어보세요. 업체에서 전화번호를 잘 못 적었나 봐요.” “아휴, 이런 감사해서 어쩌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전화기를 들고 90도로 인사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번엔 꼭 되시길 바랄게요.” 이런 성격이 아닌데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연신 ‘감사합니다.’ 소리를 듣는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 뒤로 몇 통의 전화가 더 걸려왔다. 나는 “잘못 거셨는데요.” 퉁명스러운 말 대신 “이런 전화가 많이 오는 데요. 사실은…” 하고 제대로 된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연세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의 남자 어르신이 말했다. “참 다정해서 좋네.”
‘다정하다고?’ 나도 모르게 씩 웃음이 나왔다. 눈꼬리가 선해지고, 가슴이 데워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림책 『츄로스』(홍당무 지음. 소동)의 주인공은 ‘나는 왜 추울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걷고 또 걸어도, 산에게 물어도,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봐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길 위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기차 안에서 사람들끼리 소곤거리는 소리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배낭이 없어졌다’는 걸.
여행을 그만하고 싶어진 주인공에게 사람들은 ‘도와줄게’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츄로스’(맞춤법 상 ‘추로스’가 맞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책의 제목에 쓰인데로 ‘츄로스’로 적었다)를 건넸다. ‘츄로스’는 따뜻했다. 거리의 노랫소리가 들렸고, 저녁노을 속 사람들은 행복해보였다. 다정함이 만들어낸 변화다. ‘내 마음을 찾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주인공이 만난 ‘따뜻한 츄로스’는 더 이상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책 속에서 ‘츄러스’를 건넨 그 사람은 어땠을까? 입꼬리가 올라가고 웃으면서 살짝 눈가에 주름이 잡혔을까? 눈빛이 맑아지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렸을까?
‘토끼 효과’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1978년 로버트 네렘 박사 연구팀이 토끼들에게 고지방 사료를 먹이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확인한 결과 모든 토끼들의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졌지만, 한 무리의 토끼만 혈관에 쌓인 지방이 60%나 적었다고 한다. 이상하다 생각한 박사가 이유를 알아보니 이 토끼 무리를 돌본 다정한 연구원 때문이었다는 것. 그는 토끼들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말도 걸고 쓰다듬어 주었다고 한다. 병에 걸리는 토끼와 건강을 유지하는 토끼를 나누는 것은 식단이나 유전자가 아니라 바로 ‘다정함’이었다(『다정함의 과학』-켈리 하딩 지음, 이현주 옮김. 더퀘스트-에서 인용)는 것이 이 실험의 결과였다.
토끼를 살린 것도, 사람을 살리는 것도 ‘다정함’이라면 어쩌면 세상살이는 생각보다 쉬워질 수 있을 것 같다. 눈을 맞추고 상대를 살피고,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차리는 것. 다정한 목소리로 말로 마음을 전하는 것. 그것에 보태어 내가 가진 달달하고 따뜻한 츄러스를 건네는 것. 어쩌면 그것으로 누군가는 새로운 직장에 대한 꿈을 꾸고, 누군가는 외로운 여행을 끝낼 수 있을지 모를 테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