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택 생태환경평론가
박수택 생태환경평론가

[고양신문] 조선이 개국한 지 꼭 200년 되던 1592년 임진년 4월, 20만 대군의 왜(일본)가 쳐들어왔다. 선조 임금은 한양 도성을 떠나 황급히 피난길에 올랐다. 종묘와 사직도 뒤로 하고, 백성도 버려둔 채 ‘옥체’ 보전에 급급한 임금이었다. 백성들은 슬프다 못해 기가 막혔고, 분노에 휩싸였다. 궁궐에 불길이 솟고 노비 대장도 불에 타 사라졌다. 그래도 많은 백성들은 순하고 착했다. 나라와 임금을 지키겠다며 삼남 지방에서 근왕군이 뭉쳐 5만이 넘었다. 평양에 당도한 임금을 위해 전국의 백성들이 난리통에도 소중한 양식을 바치기까지 하며 받들었다. 백성들의 충정에 기운을 차린 임금은 평양성을 끝까지 지키겠으니 조정을 믿고 모이라는 유시를 내렸다. 백성들은 무기 들고 모여들어 싸울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근왕군도 왜군에게 밀리자 겁을 먹은 임금은 평양성도 버리고 더 북쪽 압록강변 의주로 달아나고 말았다. 평양성에 남은 백성들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임금은 여차하면 국경 강마저 건너 아예 중국으로 피할 심산이었다. 처량함에 빠져 압록강을 바라보며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남긴다. “나랏일 다급한 이때 그 누가 곽자의 이광필 처럼 충성할까 / 도성 떠나 옴은 큰 계책 있음이요 나라 회복함은 그대들에게 달렸노니 / 변방 산에 걸린 달 보고 통곡하고 압록강 찬바람에 상심하노라 / 조정 신하들이여 앞으로 또 다시 동인 서인 싸우겠는가 <용만서사(龍灣書事), 선조>” 선조는 조정이 동인 서인으로 갈려 붕당을 짓고 패싸움한 까닭에 변란에 대비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자신이 왕좌에 오른 지 25년이 지나도록 일본 정세가 어떻게 변했는지 파악하고 대비하지 않은 게으름, 명나라를 정벌하러 갈 터이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고 어르는 야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흑심도 간파하지 못한 무지함, 일본을 살피러 보낸 사신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려 엇갈린 보고를 해도 다그쳐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한 어리석음의 최종 책임을 임금은 지려 하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어 21세기,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다. 헌법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했다. 주권자인 국민은 선거를 통해 대통령과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회 의원들을 뽑아 권력을 맡긴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 받아 나라 또는 지역의 일을 하는 직업인들이 정치가 또는 정치인이라는 부류의 인물들이다. 정치인은 ‘국가의 운명을 가늠하고, 국리민복의 증진을 도모하는 이른바 경세(經世)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설명도 있다(정치학의 이해, 박영사 2014년, 제5쪽). 국가의 앞날과 국민의 안위를 좌우하고 국가 사회 공동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크고도 무거운 책임을 진 존재가 정치인이다. 그렇다면 정치인은 책임에 걸맞게 지혜와 역량을 갖추고 국가의 앞날을 위해 비전을 제시해야 마땅하다. 권력은 국민이 맡긴 것임을 자각해 사사로이 휘두르지 않고, 청렴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국민의 존경을 받는다.

요즘 뉴스에 자주 오르는 제목은 ‘의-정 갈등’, ‘응급환자 뺑뺑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재판’,’김건희  최재영, 명품백’이더니 최근엔 ‘만찬’과 ‘독대’까지 오르내린다. 대통령이 여당 지도자들을 불러 저녁을 먹었다는데, 누가 좋아하는 쇠고기 돼지고기를 준비했다느니, 식후 음료를 놓고 여당 대표는 감기 기운 있는 대통령에게 찬 음료를 들어도 괜찮은가 말했다느니 따위가 지면과 화면을 장식한다. 여당 대표가 대통령과 직접 대면해 할 말이 있다는데, 그런 요망을 주고 받는 방식을 놓고 줄다리기 신경전에 말싸움까지 벌인다. 여당과 정부 지도자끼리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 간편하게 전화도 걸 수 있고, SNS 문자도 날릴 수 있고, 각자 거느린 참모 비서를 시켜 약속을 잡을 수도 있겠다. 할 말 못한 채 엉거주춤 어색한 표정들 지은 채 의미 없는 맞장구나 치면서 끼리끼리 모여 먹는 권력자들 저녁 메뉴는 국민의 관심사가 아니다. 납세자 국민으로서는 그 밥값조차 아까울 따름이다.

여야 구분 없이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건 국가 운영을 떠맡은 권력자들의 기본 책무다. 의사들과 정부의 갈등으로 환자들이 불안에 떠는 사태를 언제까지 버려둘 것인가?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히지 못하면 헌법에 명시한 국방의 의무는 의미가 바래고 만다. 기록적인 여름더위에 이어 가을 폭우로 이재민이 속출하고 수확 앞둔 농촌엔 시름이 높다.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기후가 일상으로 닥쳐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데 정부, 국회, 정당, 지자체 어디든 권력 집단을 보면 태평하기 이를 데 없다. 여와 야, 국회와 정부가 핏대 올리고 삿대질하는 논쟁에 기후, 생태, 환경 의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임진년 왜군처럼 기후위기는 빠르게 닥쳐오는데 정치권, 권력 집단은 대립과 갈등에만 익숙하다. 의식 높은 시민이 살아있는 21세기는 붕당 싸움 방관하던 선조 임금 시대와는 다르다. 무지하거나, 게으르거나, 어리석은 권력은… 심판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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