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황석영 작가의 『철도원 삼대』는 일제 강점기 노동운동을 하던 형제를 중심으로 산업노동자의 삶을 그린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1989년 방북 때 만난 서울말을 쓰는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오랜 구상으로 소설화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기의 노동운동 자료들을 살피면서 식민지 시대 이후 조선의 항일노동운동은… 사회주의가 기본이념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해방 이후 분단되면서 생존권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빨갱이’로 매도당했고, 한국전쟁이 터지고 세계적인 냉전체제가 되면서 수십 년 동안의 개발독재시대에 모든 노동운동은 ‘빨갱이운동’으로 불온하게” 여겨졌다.
소설에는 영등포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하던 항일투사들을 색출해서 지독한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조선인 밀정이 나온다. 해방이 되자 겁을 먹고 피신하려고 하는 밀정에게 그의 상사였던 일본인 경찰부장은 “이제 미군이 들어오면 우리의 치안 행정 체계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거요, … 당신은 공산주의자 때려잡는 기술자란 말이지” 하면서 피신을 말린다. 그의 말대로 미군정은 서울과 경기도의 수십 곳 경찰서 서장에 일제의 경찰이나 관리 경력을 가진 자들을 임명한다. 작가는 일제하에 이만한 고위직에 오르려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체포하고 투옥시켜야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이승만 정부는 정권 유지를 위해 친일파를 계속 중용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친일경찰들에게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고초를 겪었다.
지난 10월 5일 고양시 황룡산에 있는 금정굴에서 ‘고양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있었다. 올해로 32회를 맞는 위령제는 희생자 유가족들과 일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몇 년 전부터 금정굴 유가족들과 시민사회가 추진해오고 있는 ‘평화공원’의 건립이 아직 불투명한 가운데 열린 위령제는 침통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국전쟁 중 일어난 민간인 학살 지역 가운데 이미 평화공원이 건립된 곳이 여럿 있다. 미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던 충북 영동의 황간을 비롯하여 경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경기도 여주가 그것이다. 그러나 고양시는 한 맺힌 유가족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보수단체의 반대로 아직도 평화공원이 언제 만들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되자 사흘 만에 서울을 버리고 도망가버린 이승만 정부가 9.28 수복 후 석 달 만에 돌아와서 벌인 일이 부역자를 색출해서 처단하는 일이었다. 서울과 한강 이북의 주민들을 적 치하에 버려두고 한강 다리까지 폭파해 피난도 못 가게 막아버린 정부가 무슨 염치로 부역자를 색출한다면서 국민들을 학살했는지, 그 몰염치와 국가폭력의 잔인함은 듣는 이의 피눈물을 자아낸다. 적 치하에 남은 국민들 가운데 진심으로 북한군을 환영하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 많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과 몇몇 민간단체를 동원한 부역자 색출과 학살은 많은 경우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져 억울한 죽음이 많았으며, 재판은커녕 즉석에서 처형하는 바람에 소명의 기회조차 없었다. 부역자로 지목된 사람이 자취를 감추면 그 가족들이 대신 희생당했으니 억울한 죽음이 너무 많았다. 학살이 끝난 후 조사가 시작되었을 때 학살의 주역이었던 경찰은 아예 조사 대상도 아니었다. 금정굴 학살의 총지휘자는 단지 참고인으로 조사 받았을 뿐이다.
한 마을에 살던 주민들끼리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었던 민간인 학살 사건, 일제 강점기와 전쟁, 분단으로 이어진 굴곡진 역사가 낳은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넘었다. 강산이 일곱 번 바뀔 시간이 흘렀는데 이제는 서로 화해할 시간이 되지 않았나. 평화공원의 건립은 바로 그 화해의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외세에 의한 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시급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