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열의 고양 사(史)랑방]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부친 최원직과 최영장군 부부의 합장묘.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부친 최원직과 최영장군 부부의 합장묘.

[고양신문] 고양을 대표하는 역사인물하면 흔히 권율 장군과 최영 장군을 꼽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고양 출신은 아니다. 금수저 권율은 한양에서 태어났고 청렴의 상징 최영은 철원 출신이다. 

지난 10월의 마지막 날, 고양문화아카데미 제 3기 원우 20명을 인솔하고 최영 장군묘, 고양향교, 고려 공양왕 고릉에 다녀왔다. 두 달 만에 처음으로 강의실을 벗어나 고양의 가을을 만끽하며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현장을 답사하였다. 

고양시 덕양구 대자산 자락에 자리한 최영 장군묘에 오르기 위해서는 입구 주차장에 세워져있는 '탄생700주년 기념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고양문화원이 지난 2017년에 세운 높이 3미터, 폭 1미터 규모의 화강암비석이다. 전면에는 최영 장군의 트레이드마크인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는 대대로 문관을 배출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원직은 죽음에 이르러 "견금여석(見金如石)"이라는 유훈(遺訓)을 남긴다. 혼탁한 고려 말의 정세 속에서 청렴하고 강직한 관리가 되어줄 것을 유언했다.

최영 장군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공민왕 때다. 공민왕 원년(1352년) 조일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정 9품에서 정 4품으로 특진하며 일약 고려정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그 이후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표현을 빌리자면 87전 87승이라는 위대한 성과를 올리며 고려왕조와 백성들을 위기에서 구한다. 공민왕을 이은 우왕시대에는 왕에 이어 넘버 투의 자리인 문하시중에까지 오른다. 그야말로 최고권력자이다. 고려말기 안팎으로 혼미한 상황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엄청난 축재와 부정이 가능했던 위치였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유훈을 끝까지 지키며 청렴을 실천했고 나라의 위기를 목숨으로 구해냈다.

우리가 흔히 역사적으로 인물을 평가할 때 지조와 충절을 지킨 인물은 높이 평가하며 추앙하고 시대에 반역한 혁명가는 다소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최영 장군이 전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말년에 시대를 거스른 반역자로 몰려 처형을 당했다. 당시 중국에서 새롭게 떠오르며 중원을 장악한 명나라에 대항하여 무리하게 요동정벌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최영은 요동정벌에 반대하고 위화도회군에 성공한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에 의하면 "대국에 반하고 백성을 전쟁의 도탄에 몰아넣으려 했던 시대의 반역자인 것이다.

최영 장군묘 좌측의 문인석. 코를 조금씩 갈아서 미역국에 타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으로 코부분이 항상 훼손되어 있다.
최영 장군묘 좌측의 문인석. 코를 조금씩 갈아서 미역국에 타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으로 코부분이 항상 훼손되어 있다.

그러면 최영은 어떠한 인연으로 고양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나?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고양과 세 차례의 인연이 나온다. 첫 번째는 공민왕 13년(1365년) 지금의 고양 땅인 고봉현에서 사냥을 즐겼는데 당시 실권자인 신돈에 의해 국가가 어려울 때 한가롭게 사냥이나 즐긴다라는 모함을 받아 지방으로 좌천된다. 두 번째는 우왕 8년(1382년) 왜적을 격퇴한 공로로 고양(고봉현) 땅 300결을 하사받지만 백성들의 어려움을 감안하여 세(稅)를 거두지는 않았다. 마지막 세 번째는 위화도 회군 후 참수를 당한 뒤 아버지가 묻혀있는 고양 땅 대자산 자락에 영원히 잠든 것이다. 

국가에 충성한 죄밖에 없는 최영은 이렇게 시대를 거역한 반역자가 되어 처형 당했다. 억울한 영혼은 장군신이 되어 그의 흔적이 있는 전국 곳곳에 사당이 지어지고 지금도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고양문화원과 '고양시 최영장군 위령굿 보존회'는 매년 10월 초 최영 장군묘 입구인 통일로 필리핀군 참전비 앞 광장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심상치가 않다. 첨예한 남북관계는 물론 우크라이나·팔레스타인 전쟁을 둘러싼 미·러, 미·중 간의 대립,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일본의 동향 등이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대륙과 해양의 커다란 세력 사이에 낀 우리는 역사 속에서 많은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을 받아왔다. 최영 장군묘를 답사하고 내려오는 길목에서 다시금 지도자의 정치·외교적인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백성(국민)들의 삶에 얼마나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최영장군 탄생 700주년 기념비
최영장군 탄생 700주년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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