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박빙의 싸움이 될 것이라던 미국 대통령 선거가 트럼프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트럼프 승리 요인이 뭐였고, 민주당은 왜 패배했는가에 대한 관심도 시들해졌고, 세계 각국은 이제 예측 불가능한 트럼프 시즌 2에 대비하기 위한 궁리에 정신이 없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당장 한국으로서는 종래와는 전혀 다른 방위비 협상에 대비해야 하고, 미국경제를 지키기 위한 트럼프의 과도한 보호무역 조치들에 대응해야 한다. 북-미 관계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을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이 소외되지 않도록, 소위 한국 패싱이 없도록 대처해야 한다. 무엇보다 현재 10억 달러 수준의 미군 주둔비용 분담금을 100억 달러까지 올릴 수 있다는 트럼프의 엄포가 장사꾼의 한번 질러보는 소리 정도로 끝날 수 있도록 잘 대응해야 할 것이다. .
여기서 우리 정부 관계자들이 현명하게 잘 대응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지만 이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감도 상당하다. 왜 그럴까? 트럼프, 또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외치는 구호는 ‘미국 우선(America First)’이다. 대외정책 결정에 있어서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이야기다. 이를 통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MAGA: Make America Great Again)'고 한다. 어떤 미국이 위대한 미국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미국이 다른 우방들의 일방적 양보와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미국이 그렇다면 협상에 임하는 우리도 당연히 “한국 우선(Korea First)’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국 우익들의 수상한 정체성도 걱정 된다. 소위 보수 우익이라고 하는 ‘태극기 부대’ 집회에 왜 미국 국기인 성조기가 나오고, 더욱 이해불가인 것은 왜 이스라엘 국기가 나부끼는가 하는 것이다. 가자 지구 팔레스티나인들에게는 학살과 공포의 깃발이 되어버린 그 깃발이 왜 광화문 하늘 아래 펄럭여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아마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던져보았을 것이다.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들인 미국의 보수우익들뿐 아니라 요새 유럽에서 극성을 부리는 극우주의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내나라 우선주의’이다.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마크롱 대통령을 위협했던 마리 르펜 프랑스 국민연합 대표의 구호도 ‘프랑스 우선(France First)’이었다. 다른 나라 우익들은 모두 제나라 국익을 최우선으로 요구하는데 소위 한국의 우익이라는 이들은 다르다. 일본이 해양오염수를 방류해도 꿀먹은 벙어리요, 정부 요직에 친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인사들이 속속 내려앉아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어느 때고 어렵지 않은 때가 있었겠나 싶지만 요새 나라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안팎으로 걱정이 많다. 심란한 마음에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 보니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눈에 들어온다. 이순신이 없었다면 아마 조선은 1910년이 아니라 1592년에 망하지 않았을까? 부산포에 상륙한 왜적이 불과 20일도 안돼 한양을 점령하고, 조선 육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그때 수십 차례 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며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것이 그였다.
그런 그가 선조로부터 받아야 했던 핍박은 또 어떠했는가?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으로 몰려 형장의 문턱까지 갔던 그는 결국 이순신의 자리를 꿰찬 원균이 200여 척의 조선 수군을 고스란히 물고기 밥으로 만든 다음에야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거의 궤멸된 조선 수군을 차라리 해체하고 육군에 편입하라는 왕의 명령에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臣常有十二隻)”
칠천량 해전 후 두 달 만인 1597년 음력 9월 16일(10월 26일), 이순신은 13척(1척 추가)의 배로 330척의 적선을 맞는다. 그 유명한 명량(울돌목) 해전이다. 하루 전인 15일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 곧 ‘내가 서 있는 곳이 최후의 방어선’이요, ‘내가 뚫리면 다 뚫린다’는 각오로 전쟁에 임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풍파가 예상되는 트럼프 2기 시대에, 미국 앞에만 서면 공연히 작아지는 우리 관료나 정치인들이 가져야 할 각오가 아닐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