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비슷한 거 하는 M세대의 글쓰기>

중앙일보 웹소설 공모전 시상식 테이블에 당당히 놓여있는 필자의 이름표! [사진제공=김수지]
중앙일보 웹소설 공모전 시상식 테이블에 당당히 놓여있는 필자의 이름표! [사진제공=김수지]

[고양신문] 최근에 중앙일보에서 주최하는 웹소설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게 됐습니다. 언제나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그게 웹소설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인생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올 초에 제 극본을 퇴짜놓은 피디님도 그 극본으로 쓴 소설이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타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고, 대대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방송이 어렵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가 아무리 작가의 영향력이 큰 글이라고 해도 피디의 결정권 앞에서는 드라마 작가도 한낱 을에 지나지 않습니다. 피디가 원고를 퇴짜 놓는 순간 몇 주간 공들인 결과물이 기획료 한 푼 받지 못한 채 그대로 사장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임금 체불이나 다름없는 일이지만,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프리랜서는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습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웬만하면 피디가 요구하는 대로 고쳐줍니다. 

제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요구가 웬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0대 날품팔이의 인생을 이야기하는데 50대 기득권의 시각으로 수정을 요구하니, 이야기가 어울리지 않은 옷을 걸친 것처럼 영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명문대를 나온 주인공이 아무리 실패를 했기로서니 가사관리사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며 설정을 바꾸기를 원했고, 주인공이 혼자 행복하게 사는 결말 대신 전남편과 재결합하는 결말을 원했습니다. 아마 피디님은 살면서 별다른 실패를 경험한 적도, 이혼을 해본 적도 없을 겁니다. 이런 경험의 협소함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곤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소설을 읽고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책을 읽으면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는 일들의 질감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을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의 마음과 타인의 생각을, 내가 속한 사회와 우리가 사는 세계를 가늠하고 이해하는 눈을 기를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피디님의 요구엔 그 눈이 보이지 않았기에 저는 원고를 잘 폐기해 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괜한 허세를 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삶에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쓴 것이고, 무엇보다 제겐 확신이 있었습니다. 라디오로 한 번 방송하고 끝내기에는 아까울 만큼 재밌는 이야기라는 확신이 말입니다.

이것이 제가 방송작가로 안 되는 이유일 겁니다. 방송작가로 잘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확신이 아닌 피디의 확신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그냥 작가로서는, 이런 게 있어야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딜 수 있습니다. 고집, 집요함, 그리고 ‘당신이 뭘 알아’ 정신 같은 것들이 말입니다.

그 정신을 동력 삼아 저는 원고지 800페이지 분량의 웹소설을 한 달 만에 쓸 수 있었고, 공신력 있는 공모전에서 입상도 하게 됐습니다. 상을 받아야 좋은 글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을 받으면 선배작가들의 격려를 받은 것 같아 위축된 마음이 쭉 펴집니다. 무엇보다 상금 덕분에 두 달 정도는 생계 걱정 안 하고 쓰기만 할 수 있게 됐으니 여러모로 운이 좋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겨울에는 고요히 쓰는 날들을 보내야겠습니다.

3년 전 받은 '라디오드라마 극본 공모전' 상패 옆에 새로운 친구 '웹소설 공모전' 상패가 사이 좋게 놓였다.  [사진제공=김수지]
3년 전 받은 '라디오드라마 극본 공모전' 상패 옆에 새로운 친구 '웹소설 공모전' 상패가 사이 좋게 놓였다.  [사진제공=김수지]

마지막으로 쓰는 분들을 위해 한 말씀 올리자면, 누가 여러분의 글이 아닌 것 같다고 할 때 그 말을 너무 믿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단지 한 사람의 의견일 뿐입니다. '당신이 뭘 알아'의 정신으로 계속 쓰고 고치고 투고하다가 그래도 안 될 때, 그때 '당신 뭘 좀 아는군' 해도 늦지 않습니다. 타인의 비평을 불타는 창작의 동력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 추신
이 글에 등장하는 피디님은 제 책 『어느 날 글쓰기가 쉬워졌다』의 추천사를 써주신 분들이 아닙니다. 그분들은 제가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하게 해준, 지구상에서 가장 훌륭한 두 명의 피디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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