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고양신문] 다시 탄핵이다. 대통령 개인에게서만 요인을 찾는다면 이전의 탄핵과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번은 아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국회는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대통령의 어이없는 행적을 여기에서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른바 진보로서 민주당의 모습은? 21대를 시작으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5년 동안 이른바 개혁입법으로서 생활동반자법, 낙태 관련법, 가족 관련법 등 제정 내지 개정이 왜 안 되고 있나? 심화되는 수도권 집중, 세계 최고의 자살률, 세계 최저의 출산율로 망가져가는 한국 사회를 고치기 위해 무슨 노력을 했나?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정치로 규정하고 그 뒤에 숨으면 진보로 위장한 기득권 정치의 모습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잘 보인다. 각 분야의 진보적 전문가 몇 명에게 국회의원 자리를 줬다고 민주당이 진보정당이 되지 않는다. 대통령 탄핵 후에도 국회가 변하지 않으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이유다.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성취한 87년체제로 우리는 절차상의 선거민주주의를 갖게 되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동시에 이룬 보기 드문 사례라는 찬사도 들었다. 그 후 40년이 다 되어 간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을 하지만, 어차피 5년이면 끝이다. 임기 초반의 어수선함과 말기의 레임덕 시기를 감안하면 2~3년 임기의 대통령제이다. 대한민국 사회가 나아갈 수 있는 정책의 장기적 로드맵을 그릴 수 없는 구조이다. 정책의 연속성 보장이 불가능한 구조다.
국회는 더 가관이다. 지역구를 기준으로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은 총 득표율 51%를 얻어서 지역구 254석 중 161석을 차지했다. 국민의힘은 득표율 45%로써 90석의 자리를 얻었다. 득표율 6%p 차이가 71석의 국회의원 머릿수 차이로 나타나는 선거제도다. 21대 때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유권자의 다양성을 반영한다는 취지의 비례대표 정당 선거는 양 거대정당의 위성정당 놀음이 되었을 뿐이다. 사회적 다양성 수준이 엄청나게 높아졌고 산업 생태계도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그러나 ‘진보, 보수’ 두 편으로 가른 싸움만 하면 두 거대정당의 기득권을 편하게 지킬 수 있는 구조다.
87년체제 당시와 비교할 수 없는 규모와 양상으로 대한민국 사회 각 영역에서 끊임없이 갈등이 발생한다. 그만큼 사회가 다양해진 결과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 인생관이 다양해진 결과다. 갈등의 발생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합의의 정치가 중요하다. 그런데 합의 문화가 없다 보니 아파트 주민자치회원부터 국회의원까지 여차하면 검찰청, 법원으로 달려간다. 총선에서 5~6%만 득표해도 내 목소리를 대변해 줄 국회의원 10명 정도가 있으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국회는 거대정당과 그 주변에 붙어사는 정책꾼과 정치모리배들의 이해관계를 유지하기에 딱 적합한 모양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개헌도 하고 국회도 해산해 다시 출발해야 한다. 대통령 한 명 나가고 그 자리를 누가 채워도 정책적 연속성, 한국사회의 다양성, 그리고 높은 수준의 합의 문화를 만들 수 있는 희망을 87년체제는 주지 못한다.
부모와 자녀, 노인과 청년, 남성과 여성이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싸우는 사이 87년체제에 기댄 정치꾼, 정책꾼들은 단물 빼먹기 계산에 정신이 없다. 독일의 청소년들에게 “미래를 생각할 때 가장 걱정스러운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기후변화를 이야기한다. 우리 청소년들의 대표적인 걱정거리는 외모와 성적 그리고 친구 관계다. 나라 전체가 OECD 회원국 부동의 자살률, 저출산율 1위를 지키는 가운데, 청소년과 청년들이 꿈을 잃어간다. 2ㆍ30대 자살률도 1위다.
용산으로 향하는 손가락질을 여의도에도 돌려보자. 제왕적 대통령제와 싸움질만 해대는 국회를 바라보자. “이게 나라인가?” 87년체제에서 더 이상 못살겠다. 갈아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