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국가’를 위하여 – 박영신 연세대 명예교수
[고양신문] 박영신 연세대 명예교수가 16일 열린 고양포럼 송년모임에서 ‘현 시국을 바라보는 한 시민의 생각’을 담은 특강을 했다. 사회학계를 대표하는 원로학자 중 한 명인 박영신 교수는 고양포럼 공동대표이자 독서모임 ‘시민의 생각’ 회원으로 참여하며 고양의 이웃들과 소통하고 있다. <편집자 주>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해 마지막 달 첫 화요일이었습니다. 느닷없이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경찰은 국회의원의 출입을 막고 군대는 유리창을 부수고 국회로 들어갔습니다. 참담한 풍경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몇 시간 만에 비상계엄이 해제되었습니다. 모두 뉴스 매체에서 눈을 뗄 수 없어 밤잠을 설쳤습니다. 탄핵 발의와 국회 청문회가 있었고, 거대 군중이 또다시 차가운 이 겨울의 거리를 메웠고 그들의 외침은 밤하늘을 진동시켰습니다. 계엄 선포 후 11일 만에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습니다. 우리가 마주하게 된 역사 사건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이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하는지, 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제가끔 던지고 대답하실 물음일 터이지만. 물음과 대답을 응원하기 위하여 시민의 한 사람으로 제 생각 한 토막을 이 시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나라입니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국민이 다스립니다. 민주주의는 거부할 수 없는 인류의 가치이고, 포기할 수 없는 역사의 진로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국민인가에 따라 민주주의가 시들어버리기도 하고 무럭무럭 자라기도 합니다. 민주주의가 시들지 않고 생기 차게 자라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국민이 ‘민주 국민’이 되어야 하겠지요.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신념이 투철해야 하고 민주주의에 활력을 불어넣을 ‘민주 시민’으로 민주시민답게 살아야 하겠지요.
‘민주 시민다움’은 무엇이겠습니까? 공공 참여의 마음과 삶입니다. 먹고살기의 일에 집착하는 비좁은 관심 세계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더욱 넓은 공동체의 관심 세계로 들어가 공공의 일에 관여하는 삶의 지향성을 일컫습니다. 이는 사사로운 이익 그 너머의 ‘공공선’을 위하여 함께 만나 어울리면서 마음 터놓고 생각을 나누며 함께 일하는 삶을 뜻합니다. 이 시민다움의 삶을 엮어주는 끈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들 참여자가 막힘 없이 서로 터놓고 마음과 뜻과 생각을 나누는 ‘소통’입니다. 소통은 참여의 기본 요건입니다.
왜 ‘소통’입니까? 왜 서로 마음과 뜻과 생각을 나눠야 합니까? 인간의 ‘존재 조건’ 때문입니다. 인간은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는 ‘관계의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고 홀로 동굴 안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서로 만나야 하고 함께 어울려야 합니다. 서로 돕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관계의 삶을 떠나 살 장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더욱 근본이 되는 인간의 ‘존재 조건’이 또 있습니다. 인간은 한계를 지닌 존재입니다. 결함을 가진 아담의 후예로 에덴동산을 떠나 악이 득실거리는 이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인 한 예외 없이 모두 부족합니다. 제대로 자기를 제어하지 않습니다. 이글거리는 좁다란 자기 이익과 욕심에 이끌려 남을 속이는 거짓도 늘어놓고 남을 해치는 악행도 저지릅니다. 사태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판별하지도 못합니다. 어떤 흉측한 계략을 꾸미고 있는지 꿰뚫어 간파하지 못하고, ‘공정과 상식’이라고 하면 곧이곧대로 그 말을 홀랑 받아들입니다. 이렇듯 모두 불완전합니다. 누구도 진리를 독점하지 못할 한계투성이의 인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태어나 사는 한 모두 겸손해야 할 따름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 되고, 서로서로 귀 기울여 듣고 말을 주고받고, 서로서로 배우고 서로서로 가르치면서 안목도 넓히고 분별력도 키워야 할 심히 부실하고 부족한 존재입니다. 이 소통의 길 걸음에서 함께 만나 어울려 서로 도움이 되고 도움을 받으며 자기 변화를 일구어 소통 능력을 지닌 ‘소통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들 ‘소통 인간’이 가정과 학교와 직장, 이 모든 삶의 영역에 참여하여 함께 삶을 이끌어가는 ‘소통 사회’를 만들고, 이들 ‘소통 인간’이 국가 영역에 참여하여 함께 국가를 이끌어가는 ‘소통 국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소통 능력은 급조되지 않습니다. 삶터에서 체험되어야 하고 터득되어야 할 삶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소통 능력을 익힐 삶의 기회가 억압당하고 있습니다. 소통이 차단당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과 ‘소통다운 소통’을 하지 않습니다. 일방의 명령으로 획일된 잣대로 자녀를 규격화하여 다스립니다. 학원과 학교 공부로 시작하며 입시와 취업 준비의 공식에 묶여 그 너머의 삶의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서로 귀 기울여 생각과 마음과 뜻을 터놓고 나누지 않습니다. 이 숨 막히는 삶의 골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면, 현실을 모르는, 부모와 아이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오히려 혼란만을 자아내는 한가한 식자의 헛되고 황당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귀를 막아버립니다. 이 삶의 길에서 어떤 인간이 만들어지겠습니까? 소통 능력을 갖춘 소통 인간이 만들어지겠습니까? 꽉 막힌 시험 벌레가 만들어지겠지요. 그렇게 자라 무슨 무슨 시험에 합격하여 어떤 자리에 오르고자 모든 힘 다 쏟는 ‘성공’ 신봉자가 되어, 한 줄 서서 그 자리를 향한 맹렬한 쟁투의 싸움꾼이 됩니다.
거기에다, 집안에서는 종교 이야기나 정치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 말아야 할 금기 사항으로 자리 잡게 된 만큼 무엇이 이단이고 왜 이단인지도 배우지 못하고, 무엇이 올바른 정치이고 왜 이 주장이 옳고 저 주장이 틀리는지 따져 가려볼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하여, 자녀들이 타고난 재능과 자질을 살리기보다는 아예 죽여버리는 비참한 삶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나누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고작 먹고사는 문제이고 시험과 점수에 대한 문제입니다. 깊은 삶의 문제를 두고 집안에서 토론해본 적도 없고 논쟁을 벌인 적도 없습니다. 서로서로 얼굴을 마주하여 느낌을 나누면서 공감의 능력을 키우고 자기를 조절하고 말버릇과 말솜씨를 다듬어볼 삶의 기회도 얻지 못합니다. 어떤 기회가 있다면 공식화된 모범 답안을 전수하여 의심 없이 이를 추종하는 길들이기입니다.
소통의 삶이 무참히 추방당한 이 삶의 터전에서는 소통 인간이 키워질 수 없습니다. 소통의 뜻이나 소통의 맛을 알기는커녕 최소한의 소통 능력도 키우지 못한 채 유년기를 지나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됩니다. 이 나라의 국민이 됩니다. 어느 국가 권력의 자리를 점거하는 권력자가 되고 그 권력 조직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이들은 어느 규모이든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오르는 순간 ‘기득권자’로 삽니다. 기득권을 지키려고 온갖 수단 다 동원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여 옳음을 위하여 자기 기득권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어떤 결의와 선택을 감행하지 않습니다. 비상계엄 선포와 이를 취소하게 된 사건에 뒤이어, 헌법을 짓밟은 이 일의 우두머리를 탄핵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게 퍼지고 있을 때 이 우두머리를 충성스럽게 뒷받침해온 정당 소속 국회의원의 비공개 의총이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대통령이 탄핵이 되면 앞으로 20년 동안은 집권하지 못한다’고 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한사코 기득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기득권의 논리였습니다.
모두가 ‘자기 기득권의 상실’을 우려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당론의 밑바탕에 도사린 의식 구조였습니다. 얻은 권력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정치’는 권력을 잡아 이를 누리는 일이고, 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비굴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 저급한 술수 놀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기득권의 높은 담장 안에 들어서게 되면 이렇게 모두 괴물 인간이 됩니다. 그들을 불편케 하는 소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비판의 소리는 일거에 척결해야 할 ‘반체제’ 세력이 되고 ‘반국가’ 세력이 됩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삼권분립의 의미도 잊고 헌정질서의 정당성도 무시합니다. 자기 이익을 국가 이익과 등식화하고 자기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합니다. 자기 독선이고 자기 절대화이며 자기 우상화입니다. 그들은 기득권 안에서도 뜻있는 소통을 하지 못하고, 기득권 바깥과도 뜻있는 소통을 하지 못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자리하여 ‘소통’하는 소통을 제대로 배운 바 없고 소통의 뜻을 익힌 바 없는 꽉 막힌 자들입니다.
‘소통 국가’는 저 멀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고 또 멀기만 합니다. 우리는 8년 전에도 추운 겨울 광화문 광장에 모여 탄핵을 외쳤는데 또다시 이 추운 겨울에 여의도에 모여 탄핵을 외치게 되었습니다. 시민의 열의와 헌신에 감동하고 감격하는 것과는 별개로, 평소에 ‘소통’이 잘 되고 있었다면 어리석은 기득권자의 광기에 촉발되어 그 많은 시민이 격분하여 거리로 나아가는 고생과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소통의 끈이 잘려있었습니다. 소통의 피가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았습니다. 기득권 안에서도, 기득권과 그 바깥 시민 사이에서도 의미 있는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소통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소통해야 할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통 국민은 기득권 세력의 폐쇄성을 도전합니다. 그 폐쇄성의 성벽을 허물어뜨립니다. 소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일컫습니다. 하지만 소통은 주장과 주장 사이에서, 가치와 가치 사이에서 일어나는 나눔이고 열림과 변화의 삶을 향한 길 걸음이고, 좁다란 개인의 이익, 좁다란 집단의 이익 넘어 더욱 넓은 이익을 그리는 ‘자기 초월’의 실행입니다.
고양 시민은 고결한 시민이고자 합니다. 모든 삶의 수준에서 소통을 일구어야 한다고 믿고‘과연 나는 소통 인간인가?’ 스스로 물음을 던지며 자신을 살피는 소통 열망의 시민입니다. 오늘의 이 역사 사건을 겪게 된 동시대인으로, 우리 ‘고양 시민’은 ‘소통 국가’를 간절히 소망하는 실천 시민이고자 합니다.
나이 든 한 시민의 생각 한 토막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