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계엄이 성공했으면 우린 다시 전두환 시대를 살게 되었을까?” “설마, 거기까지...” “그치?” 여의도 집회에서 친구와 주고받은 말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루하루 드러나는 내란 음모를 볼 때 이들은 진짜 전두환 시대로 되돌리려 했구나 하는 생각에 무서워졌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이 다시 살아났다. 어린 중학생 동호는 위험하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형과 누나들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도청에 남았다. 도청에 같이 있던 선주 누나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고문 끝에 몸이 다 망가져 광주로 돌아온 사람이다. 이어지는 고문 장면들은 계속 읽기가 어려웠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드는 장면들이다.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살상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을 지휘관들.” 다행히도 이번 내란에선 영문도 모른 채 동원되었던 젊은 군인들이 국회 앞으로 모여든 시민들에게 밀려주었고, 시민들은 합심해서 의원들이 국회에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44년 전의 광주는 재현되지 않았다. 군을 동원해 세상을 전두환 시대로 되돌리려 했던 내란범들이 몰랐던 것은 40년 세월 동안 달라진 국민들의 의식이었다.
과거가 현재를 살렸다고 한다.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광주의 기억이 시민들을 국회 앞으로 달려가게 했고, 1987년 이후 국민들이 몸으로 살아온 민주주의의 경험이 비상계엄 따위를 용납할 수 없게 했다. 태어날 때부터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온 젊은 군인들은 불법적인 계엄의 하수인이 될 수 없었고, 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난해에 천만 관객을 모았던 영화 <서울의 봄>이 그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렸으며, 젊은 세대는 역사책에서 배웠던 사건을 영화를 통해 실감했다. 무엇보다도 한강 작가가 한국인의 오랜 염원이었던 노벨 문학상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강 소설 읽기 열풍이 일었다. 대표작인 『소년이 온다』는 10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선정 이유를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밝혔다. 지난 역사의 고통과 상처를 담은 『소년이 온다』를 비롯한 한강 소설의 문학적 의미를 밝힌 것이다.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일어난 한강 소설 읽기 현상은 국민들의 마음속에 80년 광주를 되살려냈다. 그리고 두 달 후 느닷없이 계엄이 선포되자 ‘역사적 트라우마’가 다시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에 국민들은 국회 앞으로 달려갔다. 노벨상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강 작가의 소설이 다시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는 기이한 경험을 온 국민이 함께 한 것이다.
내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렵게 2주 만에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지만, 내란 동조 세력의 반발과 방해가 자심하다. 무장한 군인들이 유리창을 깨고 국회에 침입하고, 장갑차를 시민들이 막아서는 광경을 온 국민이 다 봤는데도 버젓이 탄핵에 반대했던 여당 국회의원들은 온갖 궤변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정치적 이익만 계산한다. 44년 만에 나타난 계엄으로 대한민국의 국가 신인도는 땅에 떨어졌고 주가는 폭락했다. 탄핵을 막기 위해 헌재 재판관 임명을 미루고 내란 특검도 거부하는 불확실성이 지속되자 환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았다. 이러다가 회복불능 상태에 빠지는 건 아닐까 두렵다. 대한민국을 유럽국가 못지않은 선진국이라고 믿었던 외국인들이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독재자의 계엄이 일어날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에 경악했고, 우리가 수십 년 동안 쌓아올린 대한민국의 위상은 하루아침에 추락했다. 이를 다시 회복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국민들의 삶이 더욱 어려워졌지만 내란동조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세밑에 터진 대형 항공사고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충격이었다. 우리한테 왜 이러세요, 누군지도 모를 대상에게 저절로 원망이 나왔다. 불쌍한 대한민국, 희생자와 유가족은 물론 우리 모두가 불쌍했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한강 작가의 말처럼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