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KBS <역사저널, 그날> 등 인기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역사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는 건국대학교 신병주 교수가 고양문화 아카데미 최고위 과정에서 '조선의 왕릉이야기'를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과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지만 아무래도 고양시에 소재한 서오릉과 서삼릉을 중심으로 강연이 진행되었다. 강연내용 중에서 특별히 관심을 끈 부분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행복한 왕 숙종과 외로운 왕 중종'에 관한 에피소드다. 왜 한쪽은 행복하고 다른 한쪽은 외로운지, 그리고 그들은 고양시와 어떤 인연이 있는지 자못 궁금했다.
숙종은 조선 제19대 왕으로 당쟁의 혼란 속에서도 왕권강화와 부국강병을 이룬 강단있는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환국정치라는 지나친 왕권강화책으로 많은 신하들을 희생시킨 비정함도 있으나 정치·경제·군사적으로 큰 업적들을 남겨 조선후기 르네상스로 불리는 영·정조 시대의 기틀을 마련한 왕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공식적으로 세 명의 왕비가 있었다. 정비는 인경왕후 김씨(1661~1680)이다. 그녀는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로 19세에 천연두로 사망하여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 익릉(翼陵)에 묻혔다. 두 번째 부인이자 제1계비는 희빈 장씨와의 궁중 암투로 사극드라마의 단골소재가 된 인현왕후 민씨(1667~1701)이다. 인현왕후는 서인이 몰락한 기사환국(1689년)의 여파로 폐서인되었다가 갑술환국(1694년)으로 복위되나 잦은 병마에 시달리다가 1701년 괴질로 사망한다. 숙종은 안타까운 마음에 명릉(明陵)이라는 능호와 함께 서오릉에 능을 마련하고 자신도 사후에 함께 묻힐 것을 유언한다. 세 번째 부인이자 제2계비는 인원왕후 김씨(1687~1757)이다.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재실(齋室) 영사정(永思亭)을 지은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인 그녀는 훗날 영조가 즉위하는 데 큰 힘이 되었으며 서오릉 명릉에 함께 묻혀 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 명의 왕비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20대 왕 경종의 친모 희빈 장씨(1659~1701)이다. 숙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나인에서 시작하여 숙원(淑媛, 종4품), 소의(昭儀, 정2품), 빈(嬪, 정1품)을 거쳐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 이후 드디어 왕비가 된다. 하지만 환희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5년이 지난 1694년 숙종은 남인 정권에 대한 염증과 인현왕후에 대한 미안함으로 남인을 내치고 서인을 대거 등용하면서 인현왕후를 복위시킨다. 다시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는 그로부터 7년 후 인현왕후에 대한 저주가 발각되어 사사(賜死)되었고 경기도 광주에 묻혔다가 1969년 서오릉 대빈묘로 이장된다. 이렇게 보니 숙종은 죽어서도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거기에 희빈 장씨까지 살아생전의 부인들과 함께 서오릉 한 곳에 모여 있다. 그러니 이 얼마나 행복한 왕이 아니런가?
조선 제11대 왕 중종은 연산군이 평균만 했어도 왕이 될 수가 없었다. 이복 형인 연산군이 우리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반정에 의해 폐위되었기에 왕위계승 서열 1위인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추대된 것이다. 중종은 대군시절 신씨 부인과 혼인을 하여 부부 금슬이 아주 좋았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가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이고 그는 반정에 반대하다가 살해되었다. 그러니까 반정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죽인 사람의 딸이 왕비가 된 것이다. 향후 큰 화가 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즉위 직후 힘이 없던 중종을 압박하여 7일 만에 왕비를 폐위시킨다. 그녀가 바로 드라마 <7일의 왕비>와 인왕산 <치마바위>의 주인공인 중종의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 신씨(1487~1558)이다. 단경왕후는 양주시 장흥의 온릉(溫陵)에 묻혀있다. 두 번째 왕비는 대윤 윤임의 누이동생인 장경왕후 윤씨(1491~1515)이다. 그녀는 중종의 적자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죽는다. 그녀의 희릉((禧陵)은 당초 서초구 헌릉 인근에 있었으나 1537년 풍수지리를 이유로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으로 이장된다. 그리고 중종도 사후 그 옆에 묻혀 능호도 정릉(靖陵)으로 바뀐다. 중종의 세 번째 왕비는 소윤 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 윤씨(1501~1565)이다. 그녀는 즉위 8개월 만에 죽은 인종의 죽음에도 관여했다는 설이 있으며 자신의 아들인 명종의 재위기간 중에는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대윤파를 비롯하여 많은 반대세력을 희생시킨 조선의 측천무후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남편 중종이 장경왕후와 함께 묻혀 있는 것을 시샘하여 정릉을 시아버지(성종)의 선릉 인근인 지금의 자리(강남구)로 이장하고 함께 묻힐 것을 유언한다. 하지만 정릉자리에 자주 수해가 발생하여 정작 자신은 불암산 자락인 태릉에 묻힌다. 이러한 사연으로 중종은 서울 서초의 정릉, 단경왕후는 양주 장흥의 온릉, 장경왕후는 고양시 서삼릉 희릉, 문정왕후는 서울 태릉에 각각 잠들어 있다. 그래서 중종은 사후에 부인들과 뿔뿔이 흩어져 홀로 외로운 왕이 되었다.
종종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부부에게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배우자와 결혼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본다. 그래서 나도 문득 숙종과 중종에게 묻고 싶어진다. 왕이시여 죽은 후에도 함께 하셔서 진정으로 행복하신가? 혹은 떨어져 있어 정말 외로운가? 아마도 답은 본인들만의 것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