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우보농장에서 토종벼를 탈곡하는 모습
우보농장에서 토종벼를 탈곡하는 모습

[고양신문] 지난 달 중순, 나는 절친한 후배의 농장에 일손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여주로 내려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우보라는 닉네임을 쓰는 후배는 지난 십여 년간 토종벼에 꽂혀서 토종벼를 되살리고 보급하는 일에 그야말로 미친 사람처럼 인생을 불살라왔다. 

토종벼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이 땅에는 천오백 종의 벼농사가 존재해왔다. 일제는 한반도 전역을 돌면서 이름과 모양과 특징과 맛이 서로 다른 벼를 샅샅이 조사해서 기록으로 남겼고 천오백 종의 볍씨를 일본으로 가져가서 다양한 연구를 병행했다. 그들이 그토록 조선의 토종벼 연구에 공을 들인 이유는 어떤 벼를 수탈해가는 게 자신들에게 이로울지 알기 위함이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대대로 먹어온 쌀을 조선에 심게 해서 수탈해가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 결과 천오백 종에 달하는 토종벼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탈망하는 과정
탈망하는 과정
탈미하는 모습
탈미하는 모습

밭농사를 지을 때부터 토종씨앗에 관심이 남달랐던 후배는 어느 날, 토종벼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밭의 일부를 논으로 만든 뒤 국립유전자원센터에서 토종볍씨를 얻어와서 토종벼를 복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십여 년이 시간이 흘렀고, 후배는 만 평에 달하는 논에서 사백오십여 종의 토종벼를 되살려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토종벼를 되살려내는 일이 간단해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우공이산의 집념과, 전국에 토종벼를 보급하겠다는 사명감과, 영혼을 불사르는 열정이 없다면 사백오십 종의 토종벼를 되살려내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선 토종벼 농사는 기계의 힘을 빌릴 수가 없다. 사백오십 종의 모판을 만드는 일도 직접 수작업으로 해야 하고, 만 평에 달하는 논에 그 많은 벼를 일일이 손 모내기를 하고, 수확기에는 낫으로 벼를 베어야 한다. 정미소의 건조기를 쓸 수가 없으니 전통방식으로 벼를 말려야 하고, 품종별로 분류를 한 뒤 소형 탈곡기로 일일이 탈곡을 해야 한다. 그런 뒤 역시 소형 탈망기에 탈곡한 벼를 넣어 까락을 제거하고 자루에 담아, 품종명과 꽃 핀 날짜와 무게와 수분함량을 기록해야 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행여라도 품종이 섞이면 안 되기 때문에 위의 모든 과정이 굉장히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농장에 전시된 토종벼의 모습
농장에 전시된 토종벼의 모습

첫날 여주로 내려가서 후배가 작업장 겸 전시장으로 사용하는 하우스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개인이 해내고 있다는 점에 놀라움을 넘어서서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날 저녁, 후배와 함께 막걸리를 먹으면서 참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가장 인상 깊게 느낀 이야기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후배에게 토종볍씨를 사가는 농부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고, 손 모내기를 할 때나 벼 베기를 할 때면 후배의 뜻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백여 명씩 찾아와서 일손을 거든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가장 놀랍게 들린 이야기는 남태령에서 경찰벽에 막힌 트랙터부대를 통과시킨 수천 명의 MZ 여성 세대들이 토종벼를 지키자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나는 봄에 농장을 개장하기 전까지만 후배의 일손을 거들기로 하고 여주로 내려갔는데 후배와 함께 일을 하는 와중에 마음이 바뀌어서 봄이 되어도 일주일에 절반은 논농사를 돕기로 했다. 

혹시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인터넷에서 우보농장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그간 후배가 토종벼를 복원해온 역사와 함께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올라와 있으니 구경삼아 둘러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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