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철학으로 바라보는 한강의 작품세계>
고양신문, 철학아카데미, 한양문고 공동주관
한강의 대표작 3편, 깊이 있는 해석 이어져
[고양신문] 작년 10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국민들에게 크나큰 기쁨과 자부심을 안겨줬다. 1901년부터 상을 수여하기 시작한 노벨문학상 역사상 아시아 여성 작가로는 최초의 수상이라 그 의미가 더 컸다.
지난 8일, 한양문고 주엽점 한강홀에서 한강 작가의 작품 속에 숨겨진 의미를 철학적으로 해석해 보는 강연이 열렸다. <철학으로 바라보는 한강의 작품세계>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강연은 고양신문, 한양문고, (사)철학아카데미 공동 주관으로 이뤄졌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주제로 ‘4·3의 내면적 시간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최은주 건국대 연구교수는 『소년이 온다』를 ‘수치와 슬픔의 소통’으로 변환했다. 변광배 전 한국외대 교수는 『채식주의자』를 ‘나무-결백한 인간-죽음, 또는 가능성의 극한’이라는 주제로 설명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행사는 6시에야 끝이 났지만, 자리를 뜨는 참가자는 거의 없었고 짧은 시간이 아쉬울 정도로 흥미로웠다.
『작별하지 않는다』 - 눈 치우듯 진실 드러내
고양시민인 조광제 대표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덕분에, 대한민국이 문학적 열등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며 말문을 열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중요한 모티브는 ‘눈’이다. 눈이 쌓이면 밑에 뭐가 있는지, 어떤 흔적들이 남아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작가는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각오로 눈을 치우는 작업을 한 듯하다”면서 “지금까지도 우리는 4·3에 관련된 사실을 은폐하려는 강력한 폭설과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3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다”라는 일반적인 글을 예로 들며 “이처럼 간략한 연대기적인 설명에는 피로 물든 삶과 죽음의 의미,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실존은 사라진다”고 설명했다.이어, 시간 문제를 현상학적으로 분석한 에드문트 후설의 “현재가 살아 움직이는 건 기억이 현재를 구성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소개하며, “시간을 흐름으로만 나열해서는 현재를 찾아낼 수가 없는데, 현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게 문학의 역할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런 점에서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작품 속 실제 시간은 24시간이 채 안되는데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더라도 압축의 밀도와 강도가 높아 긴장감을 느낀다. 그 짧은 현장의 시간을 끄집어내 이만큼 썼다는 것은 대단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책을 안 읽으신 분들은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읽으신 분들은 한 번 더 읽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소년이 온다』 - 수치와 슬픔의 소통
영미문학비평가이자 세계문학 연구자인 최은주 교수는 『소년이 온다』를 통해 ‘수치와 슬픔의 소통’에 대해 들려줬다. 먼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배경으로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의 역할을 높게 평가했다. 번역자는 ‘한국 문학서적을 읽어본 적이 없으면서도 한국의 경제력과 국제적 지위가 향상되는 현장을 인지하고, 문학 부문도 점차 활성화될 것이라는 이유에서 선택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강은 노벨문학상을 받기 이전부터 이상문학상을 비롯해 한국 문학계에서 상을 모두 휩쓸었던 인물로, 이미 역사성과 문학성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고도 말했다. 위대한 작가는 자국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세계에서도 통용된다는 의미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는 일상생활이 이어졌을 때와 무너졌을 때의 비교가 많이 나온다. 최 교수는 “실제의 장소, 평범한 이름들, 즉각적으로 파고드는 어휘들은 독자들에게 증오심과 죄책감을 동시에 유발할 수 있다. 상처를 드러내고 고통을 마주해야 하는 방식의 글이라 읽어내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적인 수치심에도 주목했다면서 “국가는 어떤 면에서 추상적인 존재이다. 그 추상에 개인의 감정을 대입할 때 국가는 구체적인 존재가 된다. 국가폭력을 특정 개인에게 한정시키지 않고, 지금 이곳의 우리들에게 가져온 것이 『소년이 온다』의 문학적 의의”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우리가 선의를 가졌음을 확인하는 것이고, 국가를 이상적인 형태로 재생산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대한 답을 주지는 않지만,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기능이 있다”면서 “한 권을 여러 차례 깊이 읽기”를 권했다.
『채식주의자』 - 폭력성에 대한 거부
불문학자인 변광배 교수는 『채식주의자』를 통해 ‘나무-결백한 인간-죽음’이라는 주제를 철학적으로 해석했다. 변 교수는 “상당히 초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작품들의 모티브가 담겨 있는 무척 중요한 작품”이라며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책 제목과 달리 표지가 나무 그림인 것에 호기심이 생겼는데, 주인공 영혜가 자신과 나무를 동일시하려는 의지와 관련이 있으며, “나무는 동물성과 폭력성이 배제된 결백한 인간을 상징”한다고 덧붙였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조르주 바타유, 장뤽 낭시, 모리스 블랑쇼의 이론을 통해, 인간은 자기 내부의 동물성과 폭력성을 완전히 내뱉을 수 없다는 자각 끝에 죽음으로 나아가는 영혜의 행동을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작가에게 세월호와 6·25를 다룬 작품도 집필해주기를 부탁하고, 독자들에게는 “문학 사용법을 끝까지 같이 고민해 보자”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형성되었던 문학의 붐이 사그라들고 있다는 소리도 들리지만, 한편으로는 한강 깊이 읽기에 대한 지속성도 이어지고 있다. 한강 작가가 21세기 한국문학에 던진 시대정신은 이제 시작이다. 그의 작품들을 한 번 더 읽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