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테스)
[고양신문] ‘나는 항상 나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 빼고는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사소한 말투나 단어 선택이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만큼,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꼭 좋은 일인지만은 모르겠다. 왠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두렵다.’(『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테스, 한길사)
설 명절을 맞아 여수를 방문했다. 시댁을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예전보다 일거리가 줄어든 데다 이번부터는 호텔에서 따로 잠을 청할 수 있었기에 가벼운 기대감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시댁 가는 길에 새로 생긴 동네책방에 들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손글씨 추천사가 적힌 메모지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내가 좋아하는 ‘아니 에르노’와 ‘줌파 라히리’가 추천했다는 책을 골랐다.
차례상에 올라갈 음식을 준비한 뒤 호텔 숙소로 돌아와 바로 책을 집어들었다. 일기를 읽는 게 금지된 것일까, 일기를 쓰는 게 금지된 것일까. 알고 보니, 일요일에 담배 가게에서 일기를 쓸 공책을 사는 것 자체가 금지된 일이었다(195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 일요일에는 담배 가게에서 담배 이외의 상품을 금지하는 법이 있었다.). 법을 어기면서까지 발레리아가 이 공책을 몰래 산 이유는, 그 공책이 발레리아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반질반질하고 새까만 표지의 두툼한, 학교에서 흔히 쓰는 공책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발레리아, 예전에는 이런 공책에 네 이름을 쓰곤 했잖아. 그리고 뭐든 적곤 했잖아. 공부든 네 이야기든 뭐든 좋아. 여기에 뭔가를 적어 줘. 예전처럼 너의 생각, 마음, 감정을 담아 봐. 평범한 네 일상에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하지 않아?’
발레리아는 코트 아래에 공책을 숨기고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법을 어기면서까지 사 가지고 온 공책을 숨겨 둘 데가 없다. 집안 살림은 분명 발레리아의 몫인데도, 가족들에게 모두 오픈되어 있었다. 그 순간 발레리아는 생각했다. ‘이제부터라도 내 권리를 찾아야겠다’고. 일요일, 충동적으로 담배 가게에서 법을 어기고 공책을 산 발레리아는 그렇게 ‘금지된 일기장’에 ‘금지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명절인데도 시댁에 모여 식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지 않고 혼자 따로 나와 호텔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돌아본다. 며느리로서 마땅히 참고 견뎌야 할 도리를 어기고 금지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대화를 하기보다는 다들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는데, 보기 싫은 텔레비전 소리를 들어야 하고, 누군가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밤새 뒤척이는 것이 나의 의무일까? 2박 3일을 머물면서 수면 시간 포함 10시간 정도는 나만의 공간에 있는 게 나의 권리 아닐까?
발레리아의 ‘금지된 일기장’에는 아내와 엄마, 딸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가득했다. 그게 자신의 의무이며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일기를 쓰면 쓸수록 신념이 무너졌다. 자의식 강한 딸은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 발레리아에게 질투심을 유발하고, 아들은 나약함을 강조하여 연민을 자아낸다. 은행원으로 살아가는 남편은 가장의 무게를 강조한다. 발레리아는 집안일과 직장 업무를 병행하면서도 늘 죄책감에 시달린다. ‘금지된 일기장’에 각성한 자신의 마음을 적어 가는 것도 죄책감의 한 원인이다. 일기장 때문에 가정 안에서의 평화가 깨졌다고 생각한 발레리아는 결국 일기장을 불태우겠다는 말로 마지막 일기를 적었다.
소설은 결국 이렇게 끝을 맺었지만, 어쩌면 발레리아는 일기장을 불태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기장을 샀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는 일요일이 아닌 평일에 당당하게 사서 손 안에 쥐고 집에 들어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자연스럽게 일기를 적을 것이다. 20년을 어머니와 아내로 희생했기에, 이제는 자신의 권리를 찾은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흡족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일찌감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딸 미렐라일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