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가면은 벗겨졌다. 더 이상 환상은 없다!”
지난 2월 28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있었던 트럼프 미 대통령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회담을 보도한 한 독일 신문의 논평 제목이다.
이날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대담은 역대 어느 정상회담에서도 볼 수 없었던 난투의 장이었다. 기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된 대담은 곧바로 주먹질이라도 벌어질 듯 험악하였다. 명색이 양 국가 간 정상회담 자리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최소한의 의전도 격식도 없이 진행된 이날 회담은 여러모로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특히 회담에 동석한 밴스 미국 부통령이 젤렌스키에게 “무례하다”라든가 “고마워 할 줄 모른다”는 식의 비난을 면전에서 퍼부을 때, 온갖 미사여구로 장식된 외교적 의전이나 언어는 설 땅을 잃었다. 밴스의 말을 저지하며 끼어든 트럼프의 말은 더욱 적나라했다. “당신은 이제 손에 쥔 카드가 없다.” 그러니 내 말을 따라야 한다느니,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크라이나는 2주도 못 버텼을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면서 3500억 달러나 지원해 준 미국에게 이게 당신이 취할 태도냐고 몰아붙였다.
이 외에도 젤렌스키를 비아냥거리는 말들을 많이 했지만,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들의 뜻대로 하지 않는다고 한 나라 국가원수를 이렇게까지 모욕을 주는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어서 세계는,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에서 우크라이나를 돕고 있는 유럽 국가들의 충격이 크다. 우크라이나와의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일요일인 3월 2일 런던에서 영·불·독 정상들이 모였지만 유럽을 홀대하는 트럼프 정부에 대한 심기가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유럽 국가들은 트럼프 행정부 등장 이후 미국이 유럽으로부터 점차 손을 떼려 한다는 데 대한 우려가 깊다. 실제로 2월 15일 뮌헨 안보회의에 참석했던 밴스 미국 부통령은 유럽문제는 이제 유럽인들이 알아서 하라는 식의 발언을 하고 떠나, 이 문제를 두고도 한동안 유럽 언론들이 시끄러웠다. 지난 2월 24일로 전쟁 발발 3주년을 맞는 우크라이나 전에 미국이 3500억 달러 정도의 군사원조를 제공하는 동안 EU를 중심으로 한 유럽국가들이 제공한 원조 액수는 1340억 유로(이중 무기지원이 487억 유로) 정도에 그친다. 트럼프 말대로 만약 미국이 우크라이나에서 발을 뺀다면(젤렌스키가 끝내 휴전협상을 거부하고 뻗대는 경우) 그 부담은 고스란히 유럽 국가들의 몫이 되는데, 각 나라들마다 사정이 제각각 복잡한 유럽국가들이 이걸 감당할 수 있겠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럽국가들의 근본적 고민은 다른 데 있다. 1990년 독일 통일과 1991년 소련 붕괴로 인한 냉전의 해체, 그리고 그에 따른 ‘세계화’ 이후, 세계를 지배해 온 기본 질서와 골격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 이후 일반화하고 있던 ‘다자주의’적 해법이 더 이상 통용되기 어려워졌다는 불안감이다.
유럽 국가들은 NATO를 통한 대서양 동맹에 의해 안보를 상당 부분 미국에 의존하면서, 경제적으로는 WTO 등의 다자기구를 통한 자유무역에 의해 번영을 누려왔다. 지구온난화 등의 전 지구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파리 기후협약체제를 만들었고, 세계적 경제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IMF, OECD, G7, G20 등의 다자기구에 의존해 왔다. 미국이라는 군사적 초강대국이 있지만 세계의 주요문제들을 다자간 협의 틀에 의해 해결하려 해 왔는데 이제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각자도생’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린 것이다.
당장 캐나다와 멕시코에 25% 관세가 부과되었다. 캐나다와는 NATO 동맹국인데도 일체의 유의미한 협상 없이 일방적으로 관세가 부과되었다. 과거 메르켈 정부 때 독일이 방위비 분담금 비율을 높이지 않는다고 독일 주둔 미군 1만여명을 일방적으로 빼냈던 트럼프 1기 행정부 때의 일이 떠오른다.
기존의 외교적 문법이나 관행을 일체 무시하는 트럼프식 외교는 어찌 보면 냉정하고 천박하지만 솔직한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트럼프의 의도는 명백해졌다. 가면은 벗겨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