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고양신문] 얼마 전 독일 연방기본법 개정이 있었다. 기본법(Grundgesetz)은 우리식의 헌법이다. 집권구조를 둘러싼 먹거리 계산에 바빠서 1987년에 만든 낡은 헌법 개정을 40년 가까이 미루고 있는 우리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변화에 따라 필요하다면 조항별 헌법 개정을 하는 독일이다. 

지난 2009년 9월 독일 연방의회는 기본법 109조와 115조 중 '연방과 주의 재정은 원칙적으로 부채 없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헌법 개정을 했었다. 당시 누적된 연방정부 부채 규모를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예산 편성에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춰야 함을 연방과 주정부의 헌법적 의무로 명시했다. 여기에서 ‘원칙적으로’라는 의미는 부채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0.35%를 넘어서는 안되지만, 자연재해 등 천재지변이나 코로나19 위기 등 긴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 해당 기준선을 넘어 부채를 반영한 예산 편성을 연방의회가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GDP의 0.35% 범위에서 연방정부는 지금까지 적자 예산을 편성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헌법 개정을 통해 적자 예산을 편성할 수 있는 근거로서 국방비와 지역 인프라 구축 비용, 그리고 기후 위기 대응 비용을 새롭게 명시했다. 국방비 조달을 위한 적자예산 편성의 근거를 만들기 위해 기본법 109조 3의 5항을 개정해 국내총생산 대비 1%를 초과하는 국방예산 편성이 가능하게 됐다. ‘0.35%’ 제한 기준 적용에서 국방비를 제외한 것이다. 기본법 143조 h항을 신설해 사회적 인프라 구축과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5000억 유로 규모의 특별기금 조성도 명시했다. 향후 12년간 신규 투자에만 사용할 수 있는 기금이다. 이 중 기후 위기 대응과 사회적 인프라 구축을 위해 각각 1000억 유로를 주 정부가 사용할 수 있다. 또한 ‘0.35%’ 제한 규정에서 주 정부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기후 위기의 심각성은 물론 2024년 가을 드레스덴 시의 카롤라교(Carolabrücke) 붕괴 사고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독일 지역의 거리, 공공건물, 학교 등 사회적 인프라가 위험할 정도로 망가진 현실에서 나온 위기 의식이 가능케 한 헌법 개정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가져온 급변한 국제정세와 국방력 증강에 대한 필요성, 미국이 외면함으로써 더 심각해질 기후 위기, 안전의 상징이었던 독일의 모습에서 한참 멀어진 낡은 사회적 인프라를 새롭게 바꾸기 위해 아직 집권하고 있는 사회민주당(SPD)과 이제 곧 집권할 기독교 민주연합·사회연합(CDU·CSU)이 합의를 보아서 가능한 변화다. 

작년에 사민·녹색·자민당 신호등 연립정부의 해산을 선언하고 얼마 전 치른 선거에서 기독교 민주연합·사회연합이 다수당이 됐다. 그리고 사민당과 차기 연립정부 구성을 협의 중에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헌법 개정에 우선 합의를 본 것이다. 두 당의 합의에 표결 직전까지 반대 의사를 밝혔던 녹색당도 찬성으로 돌아선 결과, 헌법 개정에 필요한 제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신호등 연립정부의 한 축이었던 자유민주당(FDP)은 반대표를 던졌다. 건전재정 유지라는 자유주의적 이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진보적 이념 정당 사회민주당이 이미 전례가 있는 보수 기독교 민주연합·사회연합과의 대연정을 다시 구성하기 위한 협상에 임하고 있다. 80년대에 기세 좋게 등장한 녹색당은 사민당보다 더욱 진보적인 이념 정당으로 커왔지만, 1998년 사민당과 연립정부를 맺으면서 독일군 해외 파병에 찬성하는 등 타협의 정치를 해왔다. 이번에 출범하는 연립정부에 참여하지 않지만,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타협의 정치 모습을 보여줬다. 이념정당도 아니면서 보수니 진보니 갈라서 싸움을 일삼고 있는 정당들의 낡아빠진 87년체제를 보면서 나오는 한숨의 깊이가 더해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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