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넷 월요시민강좌] 나희덕 시인 강연
열 번째 시집 『시와 물질』 출간 앞둬
‘시와 물질, 생명’에 관한 깊은 사유
[고양신문] 건강넷, 고양신문, 사과나무의료재단이 함께하는 월요시민강좌가 지난 24일 저녁 사과나무교육센터 대강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나희덕 시인은 ‘시와 물질, 그리고 생명’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열 번째 시집 『시와 물질』 출간을 목전에 두고 있는 나 시인은, 시집에 수록될 신작 시들을 소개했다. 시인은 물질과 생명을 어떻게 감각하고, 그런 감각들은 시적 언어로 어떻게 승화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나희덕 시인은 현재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9년 중앙문예에 시 ‘뿌리에게’로 등단한 이후,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가능주의자』 등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서울에 살지만, 1990년대 중반에 고양시에 7년 정도 거주한 적이 있으며, 일산을 배경으로 쓴 시도 다수 있다. 김수영문학상을 비롯해 소월시문학상, 백석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삶과 인간, 생명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사랑을 받아온 시인은, 세계의 균열을 간명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강연 초반에는 다윈,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칼 세이건 등 다수의 과학자들이 등장했다. 물질과 생명에 관련된 시를 쓰게 된 배경이 시인의 세계와 과학자의 세계가 직간접적으로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사유를 끊임없이 했습니다. 물질은 수동적이고 죽어 있는 것, 생명은 능동적이고 살아 있는 것으로 흔히 생각하는데요. 이런 통념이 과연 맞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생명과 물질의 구분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더군요.”
이번 시집을 내면서는 특히 자연과학 책을 많이 읽고, 그런 소재들을 많이 썼다고 한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제 안에는 시인도 있지만, 과학자도 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일반적으로 시와 자연은 서로 대립관계라 할 수 있다. 그 상호 대립을 시로 주제화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시 자체가 갖고 있는 낭만성이나 서정성을 약화시키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시집에 “여성 과학자 린 마굴리스를 많이 인용했다”면서, “생명이란 단순한 물질 그 이상이다. 생명은 활기찬 물질, 조직화된 물질, 또한 영광의 역사를 간직한 물질이다. 우주는 무질서로 나아가고 있지만, 생명은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다. 생명의 목적이 여기에 있다”고 들려주었다.
시인은 “전작 『가능주의자』에는 죽음에 대한 시들이 많았다. 코로나 시기여서 막막하고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시집 표지도 검붉은 피 색깔로 했다”면서 “코로나 이후에 쓴 작품을 모은 시집이 『시와 물질』이다. 봄에 출간될 예정이라 표지를 연두색 계열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시집에는 산문시가 많고, 다큐멘터리적인 접근 방식과 서술 방식을 택했다. ‘몇 년 몇 월 며칠 어디에서’로 시작하는 시들이 다수이다. “서술 자체는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 안에는 많은 해석의 여지를 담았다”고 밝혔다. 기존의 서정시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함으로써, 잃어버린 것과 찾아낸 것이 공존한다는 의미다.
총 4부로 구성된 시집에는 기후위기, 사회적 현실, 정치적인 문제,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불평등과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상처를 치유하는 내용을 담았다. 최근 10년 동안 사회적인 문제들이 있는 곳으로 귀를 기울인 결과물이다. 시인은 도시에 사는 중산층이고, 교수로서 월급을 받고 있는 사람인데 그들의 삶에 대해서 쓸 자격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객관적 전달자로서 차용한 다큐멘터리 방식이다.
시인은 몇 편의 시를 직접 낭독해 줬다. 마지막으로 들려준 ‘손과 손으로’라는 시를 보자. 시에는 서로를 이어주고 받아주는 수용과 연결의 의미가 담겨있다.
너는 마악 손으로 떠낸 실테를/ 내 앞에 내민다// 잘 받아내려고 나는 한껏 몸을 기울인다/ 아이를 받아내는 산파처럼// 더 나빠지든 더 좋아지든/ 더 모아지든 더 흩어지든// 어찌되었든 이 실뜨기를 이어가야 해// 우리는 한 줄기 실이나 몇 가닥 머리카락으로 연결되어 있어// 나는 네 머리를 땋아주고 너는 앞에 앉은 친구 머리를 땋아주고 그 친구는 앞에 앉은 친구 머리를 땋아주고(중략) - 시 ‘손과 손으로’ 일부
“이번 시집은 시를 날실로 삼고, 과학, 사회학, 그리고 예술 작품을 씨실로 직조한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해요. 나이가 들수록, 내 얘기보다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말하기 전에 잘 듣는 일이 중요하지요. 낯선 타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곁으로 다가가는 일, 그리고 그런 존재들을 환대하는 일이 먼저예요. 제가 아무리 과학적인 소재를 다룬다 하더라도, 저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힘은 연민이라는 감정입니다.”
우리 모두는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려면 사물들과의 관계성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의 힘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발걸음일 것이다. 얼핏 보면 나희덕 시인의 시가 무척 이성적으로 느껴지지만, 그 밑바닥에는 사물의 소리를 듣고, 사물 자체가 되어 보려는 여정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시간 동안 강연을 듣고 나니 시집 제목이 은유하는 것처럼, 물질이 시를 만나면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월요시민강좌는 매달 넷째 주 월요일 사과나무치과에서 진행된다. 4월 28일에는 이영아 고양신문 대표가 ‘숲에 의지하는 도시 만들기’를 주제로 강연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