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런던과 파리를 무대로 프랑스 혁명을 살아낸 사람들을 그린 찰스 디킨즈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첫 구절이다. 이 구절은 ‘지금, 여기’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경제와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잘 나가던 대한민국이 정권이 바뀌면서 끊임없는 논란과 추문으로 국격이 떨어지더니, 마침내 반 헌법적인 계엄선포로 정점을 찍어 우리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헌재 결정만 남게 되자, 내란의 증거가 너무 많아 국민들은 곧 인용이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극우의 준동으로 사회는 혼란스러워졌고 국론은 분열되었다. 헌재의 결정이 마냥 늦어지면서 국민의 불안은 가중됐고, 법원 공격, 야당대표에 대한 총기 테러 위협, 국회의원에 대한 계란 투척 등 폭력이 일상화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디킨즈 소설에 나오는 프랑스 혁명의 혼란과 공포, 폭력의 상황에 가까워진 것이다.
여기에 기름을 붓는 것이 일부 정치권과 극우인사들의 억지 주장들이다. 국정 혼란과 국가 위기의 주범, 헌정질서의 파괴자가 민주당 이재명 세력이라는 여당 원내대표의 국회 발언은 적반하장과 후안무치의 극치를 보여준다. 사정을 모르는 외국인이 들으면 야당대표가 비상계엄을 발동한 것으로 믿을 지경이다. 헌재를 때려 부숴라, 헌재 재판관들을 공격하라고 대놓고 선동하는 여당의원도 있지만 당은 징계도 하지 않는다.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혁명의 격동 속에서 세상을 망치는데 한 역할을 한 기회주의자 조제프 푸셰에 대한 비판적 전기로 유명하다. 그는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인들이 자신의 신념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피비린내 나는 은어를 창조하였으며, 거칠고 자극적인 말에 도취된 대중이 얼이 빠져서 “과감한 조치”를 요구하면서 반대자들을 단두대에 걸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정치인들은 자신이 토해낸 난폭한 말들을 어쩔 수 없이 좇아가야 했으며, 민중의 인기를 얻기 위한 경쟁으로 더 잔혹한 말들의 성찬이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일부 의원들을 비롯한 극우인사들이 쏟아내는 자극적인 언사들과 그들의 거칠고 공격적인 말에 취해 폭력과 난동도 불사하는 얼빠진 극우 추종자들에게 그대로 해당되는 말이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국민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끊임없이 핵무장을 주장했던 정부와 여당, 사정도 모르고 이를 지지하는 국민들, 핵확산을 반대하는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을 ‘민감 국가’로 지정했다. 느닷없는 계엄 선포도 미국이 한국을 경계하는 데 한몫했다고 한다. ‘민감 국가’로 지정되면 원자력과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의 한미협력이 제한될 수 있다. 북한이 핵문제로 오랫동안 제재를 당했던 것처럼 한국의 핵무장은 국제적인 고립과 제재, 한미동맹의 훼손 등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가 국제적인 제재를 당하고 수출도 막히면 어떻게 살아갈까. 보수인사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한미동맹을 깨트릴 위험을 무릅쓰고 핵무장을 주장하는 것이 옳은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극단적인 주장을 반복하는 정치는 나라를 망친다. 비겁하기 짝이 없는 포퓰리즘 정치이다.
세계 역사는 용기의 역사일 뿐 아니라 비겁함의 역사이기도 하다. 위험한 말로 국민을 자극해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 지상에 어떠한 악덕과 잔인성도 인간의 비겁함만큼 많은 피를 흘리게 한 적이 없다고 츠바이크는 주장한다. 헌재의 시간 끌기도 비겁함이다. 혼란을 조장하는 헌재의 시간끌기를 비판하고 있는데 마침내 4월 4일 선고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혼란과 불안이 세상을 뒤덮고 있지만, 그래도 어둠의 계절은 빛의 계절을 예비하고 절망의 겨울은 희망의 봄을 품고 있다고 믿는다. 이글이 나올 때면 탄핵은 이미 결정되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