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호의 사람도서관 (23) 김호석 전 고양시 평생교육과 전문위원
인사이트크루 대표(성사1동)
[고양신문] 나이가 마흔이 넘어도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입니다. 나만 그런가 싶었는데 정치관련 소식이나 TV 뉴스를 보면, 다른 사람들 특히 고위공직자나 전문들가조차 모르는 게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언제가 되어야 우리는 의연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얼마나 더 배워야 어른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요? 오랜 시간 야학교와 공공에서 배움과 평생학습에 대해 고민하며 활동해온 김호석 전 고양시 평생교육과 전문위원을 모시고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더 배워야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는지 여쭈었습니다.
❚ 어린 시절의 풍경은 어땠나요.
제가 살던 전북 군산에는 쌀 ‘미’자가 들어가는 동네 이름이 많았어요. 미원, 미성, 장미 등. 일제강점기 때 전국에서 온 수탈된 쌀을 고르고 나르고 저장했던 곳의 이름이 동네 이름이 되었던 마을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아랫동네에 있던 큰집엔 증조할머니가 함께 살고 계셨고 그곳에는 큰아버지가 사놓은 근대단편소설집이 있었어요. 감자, 오발탄, 발가락이 닮았다 등. 당시에는 이게 재미있다기보단 여러 의미로 신선했습니다. 소설의 끝이 동화처럼 희망적으로 끝나지도 않았고 어둡고 우울한 내용이었으며, 읽고 나서는 불편했던 기억이 내내 가시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선했어요. 이 불편함의 기억과 감정은 훗날 접했던 사회생활과 일상에서도 여러 번 반복되며 저를 크고 작은 배움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당시 저희 동네는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씩 오던 곳이었어요. 중학교 때 수업이 끝나고 저녁 즈음 집에 돌아오려 큰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밤하늘에 커다랗게 펼쳐진 은하수가 보이는 동네이기도 했습니다.
❚학창시절 중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면.
초등학교 때 키가 지금의 키와 비슷했어요. 키가 꽤 컸는데도 귀에 장애가 있다 보니 잘 안 들려 수업시간에는 항상 교실의 맨앞에 앉았던 기억이 나요. 제가 저희 집과 큰집, 외갓집을 포함해 가장 먼저 나온 아이였는데, 귀에 장애를 갖고 태어나다보니 엄마가 구박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어요. 그럼에도 저는 마을에서 가족, 친척들과 북적대며 즐겁게 살았던 기억과 제가 기죽지 않고 살 수 있도록 가족어른들이 예뻐했던 기억 역시 많습니다.
제 왼쪽 귀는 날 때부터 소리가 안 들렸습니다. 오른쪽도 잘 들리지 않고. 중학교 때 큰 수술도 몇 번이나 해야 했어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이야기를 하면 잘 안 들리다보니 특히 시끄러운 식사자리 등에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게 되었어요. 어릴 때에는 목소리도 굉장히 작았고 말도 엄청 더듬어서 늘 의기소침해 있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지금처럼 말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은 톤으로 많이 키워야 했고 집중해서 듣는 훈련 역시 오랫동안 해야 했어요. 귀가 안 들리다 보니 뒤에서 누가 부르면 상대방의 위치를 알지 못해 한바퀴를 빙 돌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도 많았는데 덕분에 이런저런 오해를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의 과목이 농업이었는데 농기계 창고정리를 매일 저에게 시켰어요. 열심히 했더니 졸업식 날 단상 앞으로 나가 친구들 앞에서 선행상을 받았어요. 집식구들과 외갓집 식구들이 졸업식에 많이 왔는데 그때 삼촌이 '남이 시키는 대로만 해서 받은 상'이라며 빈정거렸어요. 아! 내가 착한 일을 해서 진짜로 상을 받은 게 아니었구나, 무언가 잘해서 받은 게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 과거 단편소설을 봤을 때의 불편함이 느껴졌습니다. 당시에는 너무 속상해서 그 이후로 삼촌을 오랫동안 안 봤던 기억이 납니다.
❚간단한 개인소개와 최근 근황을 알려주세요.
야학, 문해교육, 학습도시 등 평생교육 분야에서 근무한 지 30년 된 김호석이라고 합니다. 고양시청 평생교육과 전문위원으로 12년 근무하고 올 3월 1일자로 퇴직했어요. 73년생으로 53살이며 현재 덕양구 성사1동에 거주합니다. 지금은 데이터분석과 교육 컨설팅 등 통찰과 협력으로 학습사회를 디자인하는 '인사이트 크루'라는 법인의 대표로 근무 중이에요. 곧 수원, 공주 등 우리나라 학습도시와 교류를 맺고 있는 멕시코로 관계자들을 돕기 위해 일주일간 출장을 갑니다.
❚평생교육과 관련한 일을 하게 된 계기와 배운 점은.
대학시절에 미국 유타로 유학을 가려 준비하던 중 자원봉사실적이라도 쌓아야 하나 싶어 야학교에 별 생각 없이 자원봉사를 하러 갔어요. 야학은 제도교육 밖에서 교육을 통해 삶의 변화를 꿈꾸는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곳입니다. 다양한 사회적 변화와 함께 민중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왔죠. 70~80년대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청년들이 주로 다녔으며 지금도 전국에 40여 곳이 운영되고 있어요.
당시에는 야학교사를 하려면 연수를 거쳐야 했는데, 한 달간 교생실습처럼 훈련과 평가를 받고 활동을 시작했어요. 당시 만났던 사람들과 학생들을 통해 처음 접하는 사회의 민낯을 알게 되며 다양한 불편함을 느꼈고 그때마다 제 인생에 커다란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군산시 월명동에 소재한 청학 야학교에서 12년 넘게 교사로 일했어요. 2000년도 초반 야학교에 와야 배울 수 있는 수업을 2005년도에는 마을단위로 확산해 어른들을 대상으로 문해교육을 진행했고 교육부 문해교육 교재를 집필했죠. 군산에서의 이러한 문해교육 활동 사례가 전국적으로 인정받아 큰 상을 여러 번 받았어요. 학력인정, 평생교육과 관련된 사업과 프로그램을 많이 다루면서 다양한 네트워크를 쌓았고 자연스럽게 평생교육 쪽으로 일을 하게 됐습니다.
평생교육을 통해 배운 점은 ‘무엇이든 어디서든 누구한테나 배울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학습의 장면이 곳곳에서 발생합니다. 비록 바쁜 일상과 여러 사정으로 이런 학습의 장면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지만. 특히 배움의 시간이 짧았던 어른들에게서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나서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크게 느끼고 많이 배웠습니다.
❚평생학습이란 무엇인가요.
교과서적으로 설명하자면 전 생애에 걸쳐서 배움이 일어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평생학습은 공공재로서 정부 등 공공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민간과 학습자 입장에서의 배움이라는 가치재 입장 역시 중요해요. 그래서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의 ‘학습’이냐, 제공하는 공공의 입장에서의 ‘교육’이냐 라는 구분이 발생합니다.
평생학습은 원래 유럽에서 시작된 가치 개념의 용어로 ‘학습자’의 관점이 중요한데, 우리나라의 법령, 그리고 정책 용어는 ‘평생교육’으로 교수자의 관점이에요.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성인교육, 계속교육, 생애교육 등의 용어도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죠. 평생학습에 대한 유네스코와 OECD의 핵심 이슈도 포용성과 기술전략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요즘은 학습의 형평성(포용적 학습)과 미래역량이 현장에서 함께 고민되고 있습니다.
평생학습을 전공하거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상적인 사회는 학습이 일상에 녹아있는 학습사회, 사회전체가 학습환경이 되어 개인, 공동체, 도시나 사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점차 나아지게 만드는 사회를 뜻합니다.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 본인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켰나요.
90년대 초중반 야학교에는 다양한 사연의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야학에 왔다가 대학에 진학하고 다시 야학교사로 돌아오는 친구들이 꽤 많았어요. 이 젊은 친구들뿐만 아니라 수업에 참여한 어르신들에게도 그렇고 말로도 글로도 설명되지 않는 삶의 지혜와 태도를 야학교사였던 제가 오히려 배웠고 스스로 역시 많은 변화를 경험했어요. 그런 이유로 일부 야학교에서 교사를 강학(가르치며 배우는 사람), 학생을 학강(배우면서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야학교에 처음 왔을 때 한 달 동안은 휴일도 없이 참여자들과 밀착하도록 배정을 받는데, 이후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명절날이나 휴일날 갈 곳 없는 학습자들과 함께 같이 음식을 해먹고 놀고 공부를 하며 관계맺기를 통한 배움의 실체를 깨달았죠. 이런 경험들이 야학의 교과서를 직접 만드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고, 학습자의 일상을 돕기 위한 실제적인 고민들을 깊게 만들어 주었으며 배움에 대한 시각과 관점도 많이 넓혀 주었습니다. 예전에 제 담당교수님이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전문가란 무언가를 많이 알아서 전문가가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문제해결을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방법을 찾는 사람, 방법을 찾는 과정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전문가란 말이 떠오릅니다.
❚남은 생애의 시간을 어찌 보낼 계획인가요.
평소 평생교육, 평생학습과 관련해 정말 많은 질문과 요청을 받습니다. 지자체와 담당부서, 민간, 야학 등 네트워크에서 자연스럽게 링커의 역할을 하고 있어요. 현재는 유네스코에서 한 달에 두 번 진행하는 웨비나에 참여해 평생교육사들과 실무자들에게 국제교류와 평생학습 트렌드 등 다양한 자료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제도와 제도, 현장과 정책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이 커지면서 좀 더 나은 학습생태계를 만들고 기여하는 일들이 이제 저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경험과 다른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관계맺기를 통해 형성된 인사이트를 계속 주변에 공유하고 싶습니다.
❚필연적으로 다가올 노화와 죽음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나요? 존엄하게 늙어죽을 방법이 있을까요.
큰 수술과 사고의 경험이 많다 보니 저에게 죽음이란 멀리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제 삶과 가까이 존재하는 개념이었어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제 삶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만들었고 순간순간 의미 있게 살아가려 애쓰게 만들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감각이 소침했던 스스로를 자주 일으켜 세웠고 삶을 더 충실하게 살게 만드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저의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방에서 돌아가셨는데 그 마지막 숨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습니다. 할머니의 죽음은 저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어요. 내게 도래할 죽음 역시 나에게는 마지막 과정이겠지만, 나를 사랑하고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배움과 영감을 주는 장면이 될 수 있다 생각합니다. 사람의 배움과 성장은 죽음 앞에서도 계속 진행됩니다. 어쩌면 이게 청춘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요.
일을 하는 내내 사람과 사람, 다양한 공동체들이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의 장을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고양시에 있는 평생학습카페와 애니골에 있는 백마 화사랑이 저에게는 그런 장소였어요. 또한 야학과 문해교육, 평생교육 분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학습기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학습을 통해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게 하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교육 민주주의를 위해 애쓴 사람, 민간, 공공, 현장 등에서 관계맺기를 통해 배움의 가치를 실천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실험하는 사람, 제가 가진 경험이 다른 사람들에게 잘 전이되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지금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욕심이라면 요즘 유행하는 ‘폭싹 속았수다’라는 의미처럼 “정말 애썼습니다. 당신의 애씀이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를 바꾸었습니다”라는 말이 듣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