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구 전 주독일 대사
정범구 전 주독일 대사

[고양신문] 외국생활을 오래 한 편이다. 젊어서는 유학한답시고 옹근 11년을 독일에서 보냈고, 나중에는 3년간 독일 대사를 지냈다.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코스타리카에서는 산호세 국립대 초청을 받아 한 학기 동안 ‘한국의 정치, 사회운동’ 등을 강의하며 보내기도 했다. 스페인과 몰타에서도 몇 달씩 지내보았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빼놓고는 다 가본 것 같다. 

굳이 외국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보면 사람 생김새도 다르고 역사와 문화, 환경도 다 다르지만, 막상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사람 사는 모양새는 어슷비슷한 것이 많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에게 배우기도 하고, 또 그들이 우리에게서 배워갈 것도 있을 것이다.

지난 4월 4일 헌재에 의한 윤석열 탄핵으로 내란 위기는 일단 수습되었다. 그러나 이번 일을 통해 우리는 우리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망가질 수 있는 것인가를 처절하게 체험하였다. 그것은 12월 3일 국회에 투입된 무장병력을 통해서 뿐 아니라, 이후 내란죄 수사와 탄핵 재판 과정에서 나타난 공공연한 내란 옹호 행위들을 통해서도 분명히 보았다. 전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졌던 불법 쿠데타를 ‘계몽령’이니, ‘호수에 비친 달 그림자’니 하는 식의 말장난으로 얼버무리려 했던 내란 수괴는 물론이고, 이를 적극 옹호하며 지지자들을 선동하던 여당의 행태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이 와중에 증오와 폭력을 선동하는 한국사회 극우의 실체도 경험하였다. 우리만 이런 것인가? 한국사회의 취약성인가?

지난 2월 치러진 독일 총선에서 극우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이 제2당의 자리를 차지하며 온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지난 2월 치러진 독일 총선에서 극우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이 제2당의 자리를 차지하며 온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현상들은 지금 우리에게만 일어나고 있지 않다. 자신의 잘못된 확신에 따라 기존 국제질서를 망가뜨리면서, 결국 자신이 지키려 했던 미국의 국익까지 위태롭게 하는 트럼프나, 자신의 정적 제거를 위해 온갖 야비한 짓도 서슴치 않아 국제사회의 우려를 자아내는 에르도얀 튀르키예 대통령 행태를 보면, 닮은 그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최근 독일 총선에서는 극우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이 전통적인 다른 정당들을 제치고 제2당의 자리에 올랐다. 나치를 경험한 나라에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지만, 그러나 내란을 공공연히 옹호하던 정당이 ‘정권 재창출’을 꿈꾸며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한국 현실을 보면 남 이야기 같지 않아진다.

오늘날 세계는 그 어느 때 보다 가까이 연결돼 있다. 지구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바로 지구 다른 곳에 공유된다. 한국 대중의 환호를 샀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넷플릭스 네트워크를 통해 영어권에서는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 독일어권에서는 <Wenn das Leben dir Mandarinen gibt>(삶이 네게 귤을 주거든…)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감성을, 제주도의 품성을 공유한다. 세계적인 것이 한국적인 것이 될 뿐 아니라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영어제목 포스터.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영어제목 포스터.

그런데 문화만큼 정치도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트럼프의 재등장으로, 미국 정치에도 파시즘의 그늘이 드리우고 있다. 국제사회가 오랜 시간 공들여 합의한 자유무역의 원칙과 협정들도 간단히 무너뜨리고, 전통적인 동맹과 비동맹의 경계도 허무는 그의 행태에 대한 저항은 우선 미국 국내에서부터 커지고 있다. 세계인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주도하는 이런 조치들이 과연 세계적, 보편적 정서에 부합하는가 하는 것이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하겠다는 그의 구호가 다른 나라들과의 공존을 거부하며 이룩하겠다는 것이라면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박정희가 떠오른다. 그는 자신의 18년 장기 독재를 “한국적 민주주의” 어쩌고 하면서 정당화 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런 민주주의는 없었다. 숱한 세계의 독재자들이 보편적인 민주주의의 파도를 넘지 못했다. 지난 4개월간 한국 국민이 경험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그래서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것이었다. 시대적 반동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전진한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12월 3일 여의도로 몰려가 맨몸으로 계엄령을 막아내고 윤석열을 탄핵한 한국의 민주주의(K-democracy)는 세계인의 보편적 호응을 받는 새로운 한류 상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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