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PD의 맛집탐구] 1. 평양냉명
을밀대_ 살얼음 동동 뜬 육수, 투박한 면발 특징
대동관_ 고춧가루 뿌린 투명한 육수, 면발 가늘고 덜 슴슴
동무밥상_ 슴슴한 평냉의 진수...식사전 들깨죽 별미
양각도_ 면발 식감 가볍고 매끄러워 초보자 입맛 저격
삼지연_ 입문자 사로잡는 맛, 무초절임 장식 인상적
[고양신문] 1849년 홍석모는 우리나라 세시풍속을 모아 낸 책 <동국세시기>에서 “관서의 국수가 가장 훌륭하다” 라고 밝혔다. 여기서 관서는 평안도를 일컫는 말이고 국수는 바로 냉면이다. 즉 평양냉면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평양냉면은 원래 늦가을에 수확한 메밀로 면을 만들어 겨울에 즐기던 음식이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한결 무더워진 여름이면 특히 더 많이 찾는 평양냉면은 논쟁이 뒤따르는 음식이다. 3김시대 정치인도 아닌데 계파 논쟁이 있다. 의정부 계파, 장충동 계파, 우래옥 계파 등등. 평양냉면의 정의 자체는 동치미를 섞은 고깃국물로 맛을 낸 차가운 메밀국수. 그런데 평양냉면의 진정한 맛에 대해서는 계파 논쟁이 있을 만큼 의견이 꽤 엇갈린다. 육향이 배인 육수의 맛, 면발의 식감, 염도와 고명 등 취향에 따라 가장 선호하는 평양냉면 식당이 엇갈리곤 한다. 밍밍한 평양냉면이 맛있는지 모르겠다는 이들도 꽤 된다. 행주 씻은 맛이란 악평은 그중 압권이다. 이렇듯 모두가 쉽게 즐기는 음식이 아님에도 불황을 모르는 음식점들이 바로 평양냉면 식당들이다. 평양냉면 가격은 대개 1만2000원에서 1만6000원이니 결코 저렴하지 않다. 그럼에도 점심 피크타임 평양냉면 식당에는 대기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나 역시 평양냉면을 꽤 좋아한다. 시원한 면요리가 먹고 싶을 땐 계절 상관없이 어김없이 평냉 식당으로 간다.
그러나 나의 평냉 사랑이 첫 눈에, 아니 첫 입에 반한 사랑은 아니었다. KBS 입사 초기에 선배 피디들이 맛난 거 사준다며 데려간 곳이 마포 을밀대. 한참을 기다린 후 우리 순서가 되어 을밀대 다락방 같은 공간에서 처음 맛본 평양냉면은 미스터리였다. 아무런 맛 안 나는, 면발만 차가운 국수. 이게 왜 맛있다는 거지? 오래 기다려서 비싼 값 내면서 먹을 음식은 결코 아니란 판단과 함께 색다른 경험을 한 걸로 의미를 두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나는 2007년 봄 신규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3일 분만실 72시간> 제작 차 당시 국내 최대 산부인과 병원인 제일병원에서 촬영 중이었다. 그 부근에는 충무로의 유명한 의정부 계파 평냉식당인 필동면옥이 있었고 촬영팀이 점심 장소로 그곳을 추천하자 내키지 않았지만 촬영팀 사기를 위해 밍밍한 맛으로 기억되는 평양냉면을 같이 먹기로 했다. 평냉과의 두 번째 조우. 그런데 이게 웬일? 너무 맛있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고춧가루가 살짝 뿌려진, 육향이 은은히 배인 차가운 육수는 그 어떤 음료보다 시원했고 입 안을 채우는 메밀면의 식감도 좋았다. 3박 4일 간의 촬영 중 혼자서 필동면옥을 재방문했고 역시 만족했다. 40대 초반에 비로소 즐기게 된 평양냉면의 맛! 그때 깨달았다. 사람의 타고난 기질은 변하기 힘들지만 입맛은 변하기도 한다는 것을. (블랙 커피의 쓴 맛이 처음에는 싫지만 어느새 커피의 고소한 쓴 맛을 즐기게 되듯 말이다.) 그걸 입증해 준 대표 음식이 내게는 평양냉면이다.
제일병원 촬영을 마치고 얼마 후 마포 을밀대에 십수 년만에 다시 가봤다. 평냉 입문자로 거듭나서(?) 맛보는 을밀대의 평양냉면이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했다. 육수에 살얼음이 동동 떠 있는 을밀대 평냉은 필동면옥과는 다른 개성으로 나를 만족시켰다. 한 번 그 맛에 눈이 뜨이자 그때부터는 여러 식당의 평냉을 비교하면서 먹는 즐거움을 누리기 시작했고 그 즐거움은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만 골라 먹는 게 아니다. 전통의 평냉식당들에 더 해서 신흥 강자라 일컬어지는 평냉식당들이 다수 생겨나면서 이제는 다양한 개성의 평양냉면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고양시에도 각자 개성을 뽐내는 평냉식당이 여러 곳 있다. 최근에 이 글을 위해 고양시 평냉식당들을 돌아다니며 비교를 해보는 단거리 미식기행을 재미나게 했다.
우선 1970년대 중반 평양 출신 창업자가 평양 모란봉의 오래된 누각에서 이름을 따 마포에 문을 연 을밀대의 일산점. 평양냉면 명가 을밀대 냉면(1만6000원)은 살얼음이 동동 뜬 육수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평냉이 낯선 사람에게도 강하게 어필하는 육수이다. 창업자 작고 후 형제 간에 육수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일산점은 마포 본점과 같은 육수를 쓴다. 이곳 면발은 살짝 투박한 느낌을 주며 툭툭 잘 끊기는데 이런 식감을 나는 특히 더 좋아한다. 대부분의 평냉식당에서는 만두를 파는데 이곳에는 만두가 없다. 그렇지만 최고의 녹두전과 수육 등을 같이 먹을 수 있다.
마두역 근처 대동관에서는 장충동 계파 특유의 투명한 육수와 슴슴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장충동 평양면옥의 주방장이 독립해 창업한 곳이기 때문. 이와는 다른 의정부 계파의 평양냉면은 의정부 평양면옥을 시작으로 그곳 창업주의 딸들이 운영하는 서울 필동면옥, 을지면옥 등이 있다. 고춧가루가 살짝 뿌려져 있으며 면발이 다른 평양냉면에 비해 가는 편이고 덜 슴슴하다. 이와는 또 다른 우래옥 계열의 평양냉면은 육향이 진하고 전혀 밍밍하지 않아서 간이 잘 든 것 같은 맛이 난다. 장충동 계열의 일산 대동관은 2016년 이후 9년 연속 블루리본 맛집으로 등재된 곳으로 접시만두(6개 1만4000원)도 더할 나위없이 맛있다. 냉면 1만4000원.
고양시 식사동의 동무밥상은 1998년 탈북한, 평양 옥류관 요리사였던 윤종철 쉐프가 운영하는 곳으로 원래는 서울 마포 합정역 앞에 있었다. 미식열풍을 일으킨 TV 프로그램 <수요미식회> 출연자 황교익 음식평론가가 극찬을 하면서 크게 알려졌다. 2022년 10월 23일에 합정 영업을 종료하고 이후 고양시 식사동에 이전, 개업했다. 서울 합정역 시절에 자주 가던, 엄청 좋아했던 평냉식당이었기에 식사동 개업 이후 어떻게 달라졌는지 최근 가봤는데 더 슴슴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냉이 낯선 사람들에게는 평양냉면의 슴슴함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식당일 듯 하다. 냉면 나오기 전에 고소한 들깨죽이 나오는 건 합정 시절과 똑같다. 평냉(1만4000원) 외에도 북한식 소고기초무침, 명태식해, 메밀전병 등을 맛볼 수 있다.
평양 대동강의 섬 양각도에서 식당명이 유래된, 일산 호수공원 인근 양각도 일산본점은 함경도 출신이며 한식대첩 북한팀으로 참가한 경력의 윤선희 쉐프의 평냉 식당이다. 이곳도 <수요미식회>와 <맛있는 녀석들> 같은 맛집 소개 TV 프로그램에 빠짐없이 소개된 식당으로 동무밥상과 마찬가지로 북한 출신 쉐프가 운영하는 곳이지만 육수가 동무밥상보다는 덜 슴슴한 맛으로 초보자 입맛에도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가봤는데 면발 식감이 가볍고 매끄러운 게 특이했다. 평양냉면 1만5000원. 어복쟁반(8만-10만원)과 굴림만두(1만3000원) 또한 강력 추천 메뉴.
백두산 기슭의 호수 이름을 딴, 일산백병원 뒷편에 위치한 삼지연평양냉면은 컵에 따로 주는 육수를 마시자마자 평양냉면 입문자가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밍밍하지 않다. 그렇지만 우래옥보다는 슴슴한 편이다. 냉면 위에 무초절임이 꽃처럼 장식된 비주얼도 인상적. 평양물냉면 1만2000원. 만두도 맛있는데 6개 8000원.
2018년 평양을 방문한 남측예술단이 평양 옥류관에서 대접받은 평양냉면 영상이 크게 화제가 된 적 있다. 우리가 알기에는 슴슴해야 할 평양냉면인데 평양 옥류관에서는 식초와 양념장, 겨자를 듬뿍 넣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음식의 맛에는 유일한 버전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전통의 맛을 최대한 지켜가며 즐기고 누구는 좀더 현대화된 맛을 즐기기도 하는 것. 각자 여건 속에서 다양한 가치관과 취향이 섞여 있는 인간 세상에 불변의 것이 어디 있으랴. 고양시 냉면 투어를 하며 다채로운 세상에 새삼 감사하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