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천국 가는 날』 (전혜진, 래빗홀)
[고양신문] 분명 김밥에 라면 또는 김치볶음밥 정도만 먹겠다고 들어선 김밥천국. 그런데 막상 자리에 앉고 나면 동공 지진이 일어나는 남편이다. 한쪽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메뉴판과 옆자리 테이블에서 먹고 있는 음식 때문이다. 다른 메뉴에 대한 식탐과 호기심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게 한눈에 보일 지경이다. 남편이 내게 물었다.
“너, 뭐 먹을 거야?”
이쯤 되면 나도 오기가 생긴다. 김밥천국에 들어온 사정은 간단하다. 시간이 없거나 지갑이 얇거나. 김밥천국이라는 선택지에 괜찮은 맛에 대한 기대는 없다. 자신의 변심을 나의 변심에 기대는 남편을 보며, 나는 호락호락 넘어가 주기 싫어진다.
“자기는 뭐 먹을 건데?” “너, 뭐 먹을 거냐고.”
형님 먼저, 아무 먼저도 아니고 서로의 메뉴를 몇 차례 반복해서 묻는다. 이미 남편의 머릿속에서 김밥과 라면은 사라진 지 오래다. 내가 시킨 메뉴와 중복되지 않는 걸 선택해서 최소 두 개의 음식을 즐기겠다는 심보다. 비단 김밥천국에서만 이러는 건 아니다. 둘 다 물냉면을 먹으러 냉면집에 갔을 때 내가 물냉면을 시키면, 비빔냉면으로 변경하는 게 남편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김밥천국에서만큼은 내 음식을 뺏기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치밀어오른다. 고작 4000~5000원의 메뉴에서조차 내 것을 지키지 못하는 게 서러워진 나는 남편이 고른 걸 그대로 선택하는 악수를 두기도 한다.
그렇게 투닥거리면서 남편이 시키는 메뉴는 오징어덮밥이다. 한 숟갈 먹어 보더니, 이럴 거면 제대로 된 식당에 갈 걸 그랬다, 후회하는 표정이다. 그래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운다. 다음엔 진짜 김밥만 먹겠다고 하지만, 다음도 그 다음도 김밥과 라면은 좀처럼 선택되지 않는다. 스테이크 빼고 다 되는 이 분식집에서 메뉴 고민에 빠지는 남편에게 김밥천국은 김밥지옥이 되어 버린다. 먹는 걸로 아내와 싸워서 감정이 상하기까지 하니 지옥일 수밖에.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20~30대 시절, 지갑이 얇디얇은데도 나는 김밥천국을 즐겨 찾지 않았다. 123만원 월급 중 80만원을 저금하고 43만원으로 생활하던 나에게 김밥천국은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메뉴 천국의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김밥 한 줄을 초라하게 먹긴 싫었다. 혼밥이 자연스럽지 않던 시절이라, 점심 메뉴는 늘 직장 동료와 함께였다. ‘우리 오늘 점심은 뭐 먹을까?’라는 질문에는 같은 식당으로 향하자는 암묵적인 동의가 담겨 있었다. 김치찌개나 청국장, 비빔밥 등으로 통일해서 정신없이 점심밥을 해치웠다. 월급날이 다가오기 직전에나 다들 마지못해 분식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김밥에 라면이 땡기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지갑이 얇아지다 못해 구멍이 뚫릴 지경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지난가을, 서울에서 오전 행사를 하나 마치고 잠원동으로 향했다. 점심때라 혼자서 느긋하게 밥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럴 땐 회사 근처의 식당이 무난한 법. 그래서 들어간 곳이 ‘추억의 김밥’이었다. 혼밥 테이블에 앉아 한참을 고민하다 오므라이스를 선택했다. 김밥 메뉴만 20개가 넘는 식당이었지만, 기본에 충실한 메뉴보다 조리가 번거로운 음식을 나에게 대접해 주고 싶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아무렇게나 때우던 점심밥이 아니라, 누군가가 신경 써서 대접해 주는 듯한 메뉴를 고른 것이다.
작게 다진 채소와 밥을 기름에 볶은 뒤 그 위에 얇은 달걀 지단을 덮고, 새큼달큼한 케첩이 지그재그로 뿌려진 오므라이스. 20년 전에도 이런 점심을 먹었으면 좋았을 걸, 생각하며 기름이 코팅된 밥알을 꼭꼭 씹었다. “오늘 점심 뭐 먹을 거야?”라는 질문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하게 “저는 따로 가서 먹겠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 내게 필요했던 것은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업무로 지친 나를 잠시나마 위로해 줄 수 있는 시간이었나 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분식집의 오므라이스는 맛이 아니라, 오므라이스 그 자체로 나를 감싼다. 충분히 따뜻하고 호사스러운 점심이었다. 사회 초년생 시절 받은 상처와 고통을 이제나마 어루만져 줄 수 있어 참 다행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