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호의 BOOK회귀선 ➊
이현진 서울와우북페스티벌 대표
책 영화 덕분에 소외된 여성에 관심
김수영의 <풀> 읽으며 책읽기 고민 시작
책 축제 21회째 편협해지지 않았나 걱정
[고양신문]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지나가도록 돕는 지혜가 귀한 시절입니다. 누군가는 산책과 러닝 같은 취미로, 누군가는 따뜻한 시선과 위로, 새로운 관계맺음으로 곤혹스러운 시기를 건너가기도 합니다. 새롭게 연재되는 <나경호의 BOOK회귀선>은 ‘책으로 돌아보는 나의 인생’ 코너로, 책을 통해 삶의 어려움과 고단함을 위로받고 책 속에 몰입하게 된 고양시 이웃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아보려 합니다. 첫 주인공은 21회째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는 와우북페스티벌의 이현진(72년생, 향동동 거주) 대표입니다.
❚어린 시절 인상 깊게 보았던 책이나 장면이 있나요.
어린 시절 강렬하게 다가왔던 책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읽었던 펄 벅의 <대지>입니다. 당시 저는 언니가 하는 건 모조리 따라하는 기질 같은 게 있었습니다. 중학생 언니가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따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 작가가 썼지만 중국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는 가난한 농부 왕룽의 처, 오란이 나옵니다. 가뭄, 전쟁 등 격변기의 고된 삶을 거치며 굶주림에 시달리다, 길 위에 눌어붙은 죽은 개의 내장을 먹기까지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당시 저는 비참과 곤경에 처한 그녀의 삶에 크게 이입되었습니다.
제 생애 통틀어 스스로가 가장 성숙하다 생각했던 시기가 중학생 때였습니다. 예전에는 밤 10시 TV에서 주말의 명화를 틀어주는데 이탈리아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 ; 이탈리아어로 La Strada>이라는 흑백영화를 본 기억이 납니다.
영화에는 가난 때문에 차력사 잠파노에게 팔려온 젤소미나라는 여자아이가 나옵니다. 삶이 고단해진 잠파노는 곡절 끝에 실성한 젤소미나를 아직 눈이 녹지 않은 황량한 길가에 버리고 떠납니다. 시간이 흐르고 남자가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근처에서 빨래를 널던 아낙이 흥얼대는 익숙한 멜로디를 듣고 그 멜로디를 알게 된 연유를 묻습니다. 아낙은 몇 년 전 겨울날 마을에 나타나 거리를 배회하다 죽은 어떤 실성한 여자가 매일 흥얼거렸던 멜로디라고 답합니다.
어린 시절 접한 책과 영화 덕분에 이후로 소외되거나 아픈 여성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보는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책을 읽게 되었나요.
대학생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대학에 갈 거라는 생각조차 못해봤고 스스로라는 존재에 대해 그다지 희망을 갖지 못했습니다. 공부라는 거 해봐야 뭐하나, 적당히 살다 죽어야지. 서른 즈음이면 죽지 않겠어? 이런 생각을 주로 품고 살았습니다. 두려움, 패배감 같은 것으로 휩싸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90년대 초 대학국어 수업에서 교재를 펼쳤는데 가장 먼저 나온 게 김수영 시인의 시 <풀>이었습니다. 리포트를 써와야 하는데 당시에는 참고서가 없으니 논문을 다 찾아서 사람들이 어찌 생각했는지 읽어보고 나는 이 시를 어찌 해석해야 하나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의 저는 특히 교과서에 나온 시나 에세이를 무척 좋아했는데 아사코와 세 번 만난 인연의 이야기가 담긴 피천득의 <인연>을 좋아했고 그 안에서 소개되었던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버지니아 울프가 등장하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라는 시 역시 좋아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 <파도>, <등대로> 등을 차례로 읽고 작가가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김수영 시인의 <풀> 덕분에 책을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고 이후 프랑스의 시인 랭보를 통해 프랑스 문학을 접하며 책을 어떻게 따라갈지, 어떻게 읽을지로 고민이 확장되었습니다. 영어연극동아리를 통해 연극의 뿌리라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접하기도 했구요.
또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억척 어멈과 그의 자식들>과 같은 시와 희곡 작품들을 읽게 되는데 훗날 대한민국 대표 국악인이자 음악인인 이자람씨에 의해 <사천의 선인>은 ‘사천가’로, <억척 어멈과 그의 자식들>은 ‘억척가’로 작창(창작 판소리)됩니다. 그때 그 소리를 들으며 엄청난 희열에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간단한 개인소개와 최근 근황을 소개해주세요.
72년생 이현진입니다, 2008년 행신동 소만마을에 살다가 6년 전 향동동으로 이사왔습니다. 와우컬쳐랩 사단법인의 대표로 국내의 대표적인 책 축제 ‘서울와우북페스티벌’을 올해로 21회째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외 각종 문화예술 관련 교육, 행사, 인문학사업 등을 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회사 사정이 쉽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이걸 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답이 없어 안개 속 벼랑을 걷는 느낌처럼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여력이 없다 보니 내가 요즘 편협해지지 않았나, 그래서 북페스티벌의 방향성에 좋지 못한 영향을 주는 건 아닐까 종종 걱정합니다.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책이 있나요.
몇 년 전에 읽었던 문화인류학자 김현경 교수님의 <사람, 장소, 환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자는 ‘사회적 성원권’, ‘환대’ 등의 문제를 오랜 시간 연구하였는데 사람, 장소, 환대라는 세 개념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사회를 다시 정의하는 내용입니다, 과거의 영화나 소설 속에는 하인이나 노예가 옆에서 무얼 하든 주인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장면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 다시 말해 ‘사람’이라는 것은 지위인가 아니면 조건인가를 고민할 수 있게 해주는 책입니다.
❚책을 통해 삶의 괴로움이나 고단함을 지나거나 위로받은 적이 있다면.
사회역학자인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김승섭 교수가 쓴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떠오릅니다. 책에서는 질병의 원인을 개인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국가, 학교, 직장, 지역사회 등 공동체의 문제를 통해 원인을 찾고, 사회적 고통을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사회통계적인 데이터와 연구결과로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질병의 유전적, 육체적 요인 외에도 사회적 원인을 찾다보면 약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위험한 환경에서 더 자주 아픕니다. 위험한 환경 속에서 근무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소득이 없는 노약자, 차별에 노출된 외국인 주민과 소수자들, 참사를 통해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의 몸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결핍과 왕따 등 사회적 상처를 당한 사람이 얼마나 병들었는지 책에서는 질병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고민합니다.
인간의 진화가 최적자가 아닌 다정한 자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브라이언 헤어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와 보육사 출신으로 영국 사람과 결혼한 일본 작가 브레디 마카코의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또한 질문의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마카코는 자녀가 성장하는 과정을 저자인 엄마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민자의 애환과 차별, 계층 격차 등에 대한 내용을 책에 담았습니다.
❚남은 생애의 시간을 어찌 보낼지 계획이 있습니까.
중학교 때 저는 이미 늙은 나의 미래를 떠올려본 적이 있습니다. 늦가을 환한 햇살이 비추는 창문 아래, 1인용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보다 꾸벅꾸벅 조는 할머니의 모습이 편안하게 다가옵니다. 이게 제가 바라는 늘그막의 모습입니다. 저는 앞으로 나이가 들고 홀로 사는 시간이 많아질 겁니다. 삶의 고단함과 애잔함에 대한 두려움도 있겠지만 그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까이 곁에 두고 덤덤히 건너갈 생각입니다.
❚나의 삶을 책으로 만든다면 제목으로 무엇이 좋을까요.
스스로를 보잘 것 없는 사람, 부스러기 같은 존재라 생각한 적이 많았습니다. 이 나이가 되고 삶을 돌아보니 내가 쏟은 노력에 비해 운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느냐, 그 최소한의 조건이 무엇이냐를 고민하면 제 책 제목은 아마 <부끄러운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가 될 것 같습니다. 최근에 사람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겪으며, 내가 참 부끄럽구나 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말해놓고 보니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프랑스 작가인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이라는 작품이 떠오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