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책속으로 떠나는 여행>

(1) 박경리의 <토지>와 함께 섬진강 따라 가는 길

25년 고통스런 글쓰기 생각하며
방대한 이야기 바다로 빠져들어
섬진강 나루서 만난 평사리 사람들
소설속 등장인물처럼 감정이입돼

지리산을 배경으로 경남 하동 평사리에 들어선 최참판댁.

섬진강 마을 평사리, 최참판댁
[고양신문] 1897년의 한가위, 평사리 마을 농부들이 타작마당에서 징과 꽹과리를 울리고 장구를 치면서 신명을 내는 명절 풍경으로 『토지』는 그 길고 긴 여정을 시작한다. 1894년의 동학혁명이 민중의 패배로 끝난 뒤지만, 명절을 맞은 평사리의 농부들은 괴롭고 한스러운 일상을 잊으며 신명을 낸다. 마을의 지배자 최참판댁의 윤씨부인은 사리분별이 분명하고 소작인들에게 인색하지 않았으며, 이번 명절에도 섭섭잖게 돈과 곡식이 나갔다. 징을 치는 두만아비, 마을에서 제일 풍신 좋고 인물이 잘난 사내 용이가 하얀 베수건 어깨에 걸고 장구를 메고 있다. 그밖에 『토지』의 긴 여정을 함께 할 인물들이 타작마당에 등장한다. 곧이어 평사리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마을을 굽어보는 최참판댁의 당주 최치수와 그의 하나뿐인 딸 서희, 그녀와 함께 등장하는 침모의 딸 봉순이, 하인 길상이 등은 소설을 끝까지 이끌고 갈 인물들이다. 그리고 머슴 구천이 스치듯 지나간다. 

한번 손에 들면 놓을 수가 없어 『토지』를 대여섯 번 읽다보니 내게는 이들이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십오 년 전 처음 섬진강에 갔을 때 조용히 흐르는 강줄기와 하얗게 펼쳐진 드넓은 모래밭도 아름다웠지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섬진강 나루에서 배를 기다리는 평사리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장면이 그려졌다. 가까이에 있는 절 연곡사에 갔을 때는 청상과부를 연모하던 김개주에게 겁탈당해 남몰래 아들을 낳아 버리고 떠난 윤씨부인의 정상에 마음이 아렸고, 병든 별당아씨를 업고 연곡사의 우관스님을 찾아온 김환의 절박한 모습이 떠올랐다. 후에 동학의 접주가 되는 김개주는 처형당하고, 그의 아들 김환이 아비를 이어 동학 잔존세력을 모아 지리산을 무대로 활동한다. 구천이란 이름으로 모친이 있는 최참판댁 하인으로 들어왔다가 형수인 별당아씨와 사랑에 빠져 지리산으로 도피하고, 별당아씨가 죽은 후 평생 가슴에 멍울을 안고 사는 사내 김환의 그림자도 절 곳곳에 남아있었다. 평사리를 내려다보는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는 큰 한옥이 들어서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인부들에게 물어보니 ‘최참판댁’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하인 구천이와 함께 도망 간 어머니, 살해당한 아버지,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할머니마저 호열자로 세상을 떠난 후, 재산을 노린 친척 조준구의 핍박을 받으며 서리서리 한이 쌓였던 서희의 최참판댁, 몇 년 후에 다시 갔더니 완공된 최참판댁은 관광객들로 번잡스러웠다. 

어머니의 품 같은 지리산의 끝자락, 멀리 곡성에서 구례를 지나 굽이굽이 이어지다가 하동에서 남해로 빠지는 섬진강을 굽어보며 옹기종기 모여 사는 하동 평사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이곳은 한말의 농촌을 구성하는 전형적인 인물들, 최참판댁으로 대표되는 지체 높은 양반과 시골 향반들, 하인과 머슴, 노비, 마을의 소작인들, 서당의 훈장, 의원, 무당, 목수, 지리산의 포수 등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공간이다. 

평사리에서 용정, 진주로 
일제에 의한 국권 상실, 전통적 가치의 붕괴, 농업경제에서 상업경제로의 변환이라는 한말의 사회적 변화가 소설의 배경이 되는 1부에서는 최참판댁의 몰락과 조준구의 재산 탈취 과정 등이 대단히 흥미롭게 전개된다. 의병이 되어 지리산에 숨어든 마을의 장정들과 함께 서희가 조준구의 악행에 쫓겨 간도로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2부는 1910년대의 간도 용정촌의 조선인 사회를 중심으로 전통적 가치와 근대적 가치의 갈등, 신분질서의 붕괴 등을 보여준다. 간도를 둘러싼 중국, 러시아의 정세와 여기서 전개되는 독립운동의 양상이 그려지고, 총명하고 강인한 성격의 서희는 뛰어난 정세 판단과 조준구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용정에서도 큰 재산을 일군다. 조준구를 몰락시키고 진주로 귀환한 3부는 1919년 3·1운동 이후 진주와 서울 같은 대도시의 삶이 집중적으로 그려지면서 의사, 교사, 신여성, 문필가 같은 지식층이 대거 등장한다. 4부의 서사 공간은 서울, 동경, 만주에서 하동, 진주, 지리산까지 더욱 확대되면서 이야기의 중심도 점차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여러 갈래가 나타나고, 지식인들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당시의 사상적 경향과 동아시아 정세에 대한 분석도 이루어진다. 1940년부터 1945년 8·15광복까지 이어지는 5부는 주요인물들의 죽음과 그들의 자식 세대를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대단원을 이룬다. 

박경리 작가의 생전 모습.
박경리 작가의 육필원고.

『토지』의 긴 여정에 신분이 다른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2대 3대로 이어지지만, 그들은 제각기 개성적인 성격과 함께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간다. 그들의 삶속에는 역사의 다양한 측면과 시대적 변화가 녹아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독자들은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를 생생하게 그려보면서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토지』를 읽는 것은 식민지 시대 조선과, 간도의 조선인 사회를 구성하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동학혁명부터 1945년 광복까지 한반도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전체를 무대로 파란 많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내는 현장에 함께하는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토지』는 문학을 넘어 한민족의 방대하고 생생한 역사기록으로도 큰 가치를 지닌다. 『토지』의 인물들은 지금도 살아있으며, 역사는 되풀이된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뒤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한국문학의 거목 박경리 선생, 1926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한 선생은 1955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2008년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토지』외에도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 여러 작품이 있지만, 『토지』를 빼놓고는 그를 말할 수 없다. 1969년부터 집필을 시작한 대하소설 『토지』는 1994년 5부를 마칠 때까지 무려 25년에 걸쳐 쓴 작품이다. 1부를 쓰던 중 암선고를 받고 수술까지 했지만, 보름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다고 한다. 선생은 “백장을 쓰고 나서 악착스런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어찌하여 빙벽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나는 주술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였더란 말인가”라면서 글쓰는 고통을 한탄했지만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박경리 작가의 서재.

그 긴 소설을 대여섯 번이나 읽으면서 나는 왜 그렇게 『토지』에 애착을 가졌을까. 작가의 고통스러운 글쓰기가 고스란히 전달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매번 읽을 때마다 식민지라는 삶의 조건과 격동하는 역사의 흐름, 절절하게 가슴을 치는 인물들의 한 맺힌 삶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가는 방대한 이야기의 감동에 빠져든다. 
깊은 한을 안고 살아가는 『토지』의 인물들, 어머니를 앗아간 구천이를 용서할 수 없었던 서희는 용정에서 그가 자신이 그토록 사모하던 할머니 윤씨 부인의 가슴아픈 아들이자 자신의 삼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오열한다. 서희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지만 가문에 대한 서희의 무서운 집념과 완전히 허물 수 없었던 신분의 벽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던 길상은 김환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사모하는 길상이의 마음이 아씨에게 있음을 알고 용정으로 떠나는 서희 일행과 떨어져 기생이 되는 봉순이, 무당 딸이라는 이유로 맺어질 수 없었던 용이와 월선의 한 맺힌 사랑, 그밖에도 크고 작은 인물들이 저마다 가슴에 한을 안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한을 삭이며 살아간다. 박경리 선생은 어찌 이다지도 절실하게 삶의 굽이굽이에 서린 한을 풀어냈을까. 한 등장인물은 사람 사는 일이 모두 한이라고 말한다. 삶 자체가 한이요, 한은 인간 존재의 숙명이라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한과 민족사의 한을 깊이깊이 새겨주던 박경리 선생은 고향 통영에서 안식하고 있으며, 마지막 거처이자 집필 활동을 하던 원주에는 토지문화관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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