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호의 책이 있는 풍경]
고양 향동동 '미스터 버티고'

'미스터 버티고' 폴 오스터 소설제목
책의 감동 연상하며 책방이름 삼아

10년 전 일산서 문 열었다가 옮겨
황석영, 은희경 작가도 단골손님

서가에 꽂힐 만한 '필독서' 비치
내가 쓴 '세계서점기행' 저자 맞아줘

김언호(왼쪽) 한길사 대표가 지난 13일 경기 고양시 향동동에 있는 '미스터 버티고' 신현훈(오른쪽) 책방 대표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언호(왼쪽) 한길사 대표가 지난 13일 경기 고양시 향동동에 있는 '미스터 버티고' 신현훈(오른쪽) 책방 대표와 인터뷰하고 있다.

[고양신문] 작은 책방 ‘미스터 버티고’는 고양시 덕양구 향동에 있다. 서울과 접경이라서 그런지 전화국번이 ‘02’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기자생활을 한동안 하고, 다시 50여 년 책을 만들면서 서울과 경기도의 웬만한 곳은 다녀서 알고 있지만, ‘향동’이라는 마을은 처음 들었다. 
야트막한 산들로 둘러싸인 향동, 나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런 마을이 있다니! 10년 전에 그린벨트를 풀고 해서 건설된 이른바 작은 신도시다. 거대한 지식산업센터들과 아파트들이 숨도 못 쉴 것처럼 오지의 마을을 가득 메우고 있다. 건물들이 산보다 높다. 21세기 한국 수도권의 한 풍경이랄까. 카페・베이커리・국밥집・떡집・맥줏집・카센터・학원 등등 없는 것이 없다. 그리고 책방 ‘미스터 버티고’가 있다. 
전철은 없지만 은평 버스차고지가 있어 버스들은 서울의 이곳저곳을 다 간다. 태릉까지도 간다. 국방대학원과 서오릉이 가까이 있다. 상암 DMC까지는 걸어갈 수도 있다. 마을 가운데로 작은 하천이 흐른다. 북한산의 한 계곡에서 발원한다. 미스터 버티고는 이 천변에 있다. 은평 버스차고지에서 내려 15분 정도 걸어오면 미스터 버티고를 만난다. 
순간 나는 박태원의 장편소설 『천변풍경』을 떠올렸다. 1930년대의 식민지 시대, 청계천변에 사는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그려내고 있다. 작가 박태원은 봉준호 감독의 외할아버지라고 했지. 책방의 문을 밀고 들어서면 왼쪽에 소설 『천변풍경』이 놓여 있다. 천변의 양쪽으로 좁은 길이 나 있다. 주민들이 산책한다. 산책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도 할 것이다. 책방에 들른다. 

“아, 책냄새가 좋다”
2015년 미스터 버티고는 일산병원 맞은편에 문 열었다. 월세가 오르고 해서 여러 곳으로 유랑하다가 지난해 이곳에 자리 잡았다. 책방을 집 근처로 옮겨서 아이들 돌볼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책방 이름이 ‘미스터 버티고’(Mr. Vertigo)다. 버티고는 영어로 ‘현기증’을 의미한다. 젊었을 때 감동적인 책을 읽으면,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머리가 아찔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그 어지러움을 뜻하는 버티고를 책방 제목으로 삼았다. ‘미스터 버티고’는 미국작가 폴 오스터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오스터의 소설들은 도서출판 열린책들에서 거의 다 번역해냈지만, 미스터 버티고는 원작 이름과는 다른 『공중곡예사』로 번역・출간되었다.

인터뷰 중간에도 '미스터 버티고' 책방에 독자들이 들어와 책을 고르고 있다.

책방지기 신현훈은 언젠가는 장편소설 하나쯤은 쓰고 싶은 문학도다. 대학원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전공한 철학도다. 거금을 들여 구입한 영어판 플라톤전집(전 10권)과 아리스토텔레스전집(전 20권)을 서가 위쪽에 모셔두고 있다.
책방에 들어서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진다. 책방지기도 기분이 좋아진다. 5, 6세 되는 아이가 책방에 들어서면서 “아, 책냄새가 좋다”고 한다. 책향기를 뿜어내는 책방! 
거대한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고 아파트들로 가득한, 10년이 더 되어가는 ‘신도시’지만 아직도 도서관다운 도서관이 없다. 향동의 현실이다. 책이란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구현하는 필요・충분조건이다. 독서실 같은 작은 도서관이 하나 있을 뿐이다.
“책을 펼치는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희망이지요. 책방하는 우리의 행복입니다.”
책방을 내기 전에도 책과 연관되는 일을 했다. 1998년부터 인터넷서점에 서평 쓰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3년간 1인 출판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여섯 권의 책을 펴냈다. 
처음 책방을 열면서는 7천여 권을 비치했다. 지금은 4, 5천 권으로 줄였다. 월세 내고 하면 한 달에 1, 2백만 원밖에 남는 게 없지만, 책방은 그에겐 이제 운명 같은 것이다. 
이렇게라도 책방 미스터 버티고를 유지하는 것은 부인의 ‘내조’가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8살 남자 쌍둥이를 돌보고 책방을 맡아 한다. 아내가 취업해서 생활비를 번다. 만화읽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책 읽어라, 책 읽어라 하지도 않는다. 스스로 읽게 한다.

“책 읽는다는 건 무사하다는 뜻”
‘책 읽기’는 마음이 편해야 가능할 것이다.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쿠데타로 책방 방문객이 전멸되는 것이었다.
“책 보고 검토하는 것이 내 일인데, 나의 눈에도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뉴스에 매달렸습니다. 한강 책도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대법원이 이재명 후보의 고법 무죄판결을 파기환송할 때도 역시 그랬습니다.”
그의 명함에는 “책을 읽는다는 건 무사하다는 뜻이다. 다들 무사하기를…”이라고 기록해놓았다.
일산의 백석동 홈플러스 맞은편에서 마두역 쪽으로 책방을 옮겼을 때, 방문객이 바닥이었다. 월세를 내기 위해 배달 일을 하기도 했다. 
책 대여되느냐고 묻는 독자도 있지만, 그가 읽은 책을 ‘무료대여’ 하고 있다. ‘카드북’이라고 이름 붙였다. ‘독서카드’를 책 속에 꽂아 놓는다. 읽은 사람들이 생각을 적게 한다.
11시 반에 오픈해 4시까지 운영하고 저녁 7시까지 세 시간 동안 브레이크 타임을 갖고, 이후 7시부터 10시 30분까지 운영한다.
“임대료 낼 정도는 판매됩니다. 지난해와 올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역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였습니다.”

천변을 산책하는 주민들이 '미스터 버티고' 책방 앞을 들러 가판대의 책을 살펴보고 있다. 
천변을 산책하는 주민들이 '미스터 버티고' 책방 앞을 들러 가판대의 책을 살펴보고 있다. 

카운터 앞에는 그가 재미있게 읽는 소설들을 배치해놓고 있다. 윤성희, 예소연, 백수린, 미키7 등의 책이 눈에 띈다. 스페인 작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장편소설 『바람의 그림자』와 영국 작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권독한다.
“문학의 경우 트렌디한 독자들도 많지요. 전에는 20대, 30대 여성들이 독자군이었지만, 지금은 50대까지 올라갑니다. 미국 작가 셸리 리드의 장편소설 『흐르는 강물처럼』을 좋아해요. 호흡이 길지만, 따뜻하고 잔잔한 작품입니다. 인디언 청년을 사랑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권독하게 되지만, 내 취향이 아니라도 독자가 찾으면 비치해 놓습니다.”
나는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푸른 들판을 걷다』와 『맡겨진 소녀』 세 권을 구입했다. 책방에 일단 들어서면 어떤 책이라도 한두 권 구입하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다. 한길사가 문 열고 있는 헤이리의 북하우스를 시작하면서, 이 원칙은 더욱 고수하게 된다.
 카페에 가면 으레 커피를 주문하면서 책방에 들르는 사람들은 왜 책을 안 사도 된다고 생각할까. 책방에서는 온갖 책을 그냥 구경할 수도 있는데.

인문의 명저들을 ‘선서’해놓아
미스터 버티고는 나름 우리 시대의 필독서들을 ‘선서’(選書)해놓고 있다. 작심하고 버티고에 1년 정도 드나들면서 비치되어 있는 인문서들을 읽는 프로그램도 그럴듯하겠다. 이 시대 교양인들의 서가에 꽂힐 만한 명작・명저들을 만난다는 것은 애서가들에게는 축복 같은 일이 아닌가.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 한스 페터 그라베르의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의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의 『권력과 진보』가 세계적 차원의 위기적 상황을 탐구하고 있다.
이미 현대의 고전이 되고 있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온다. 스테디셀러들이다.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와 『야생의 사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버티고의 분위기를 고양시키고 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루소의 『에밀』,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헤로도토스의 『역사』, 밀의 『자유론』이 미스터 버티고를 신뢰하게 한다.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 쓰기』 시리즈와 문광훈의 『가면들의 병기창: 발터 벤야민의 문제의식』은 글 읽고 시대정신을 탐험하는 사람들의 서재에 으레 구비되는 책일 것이다.
내가 쓴 『세계서점기행』이 저자를 맞아준다. 『세계서점기행』을 쓰기 위해 나는 열두 번의 해외여행을 가야 했다. 책 한 권 구경하기 힘든 시골에서 중학교를 다닌 나는 고등학교를 부산으로 갔을 때, 가장 경이로운 풍경은 교문을 나서면 이곳저곳에 문 열고 있는 책방들이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만난 수십 개의 서점과 그 수백만 권의 책들의 이미지는 지금까지 내 가슴 저 깊은 곳에 존재하고 있다. 책방이란 내 삶의 한 중심이다. 
“『세계서점기행』은 중국어판・대만판・일본어판으로 번역 출간되었어요. 5월 하순엔 러시아판이 나옵니다. 한국어판까지 하면 5개 국어로 출간되는 셈인데, 버티고에서 기념 북토크라도 한번 해보고 싶네요. 향동천변의 숲과 청둥오리를 보면서, 개구리 소리를 들으면서.” 
“그러고 보니 한길사 책이 많네요.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과 알바 데 세스페데스의 『금지된 일기장』,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길사에서 낸 것은 아니지만 양귀자의 장편소설 『모순』과 헤세의 에세이집 『나로 존재하는 법』은 고정자리가 있을 만큼 스테디셀러입니다.”
큰작가 황석영은 미스터 버티고에 자주 출현하는 인사였다. 소설가 은희경은 한 달에 한 번씩 자신의 작품을 낭독해주었다. 작가도 독자들을 만나는 것이 즐겁다면서.

'미스터 버티고' 책방에서 독자들이 책을 고르고 있다.

책은 아름답고 책은 재미있다
향동천변의 미스터 버티고 첫 방문은 나를 신선하게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 서가의 책들과 책방지기 신현훈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이번에는 독서가이자 번역가인 박종일 선생과 동행했다. 박 선생은 1970년대에 이곳 향동에 살았다. 닭장하던 집을 스스로 고치고 도배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7남매의 거처였다. 참으로 가난한 시절이었다. 아버지 박기정 선생은 4월혁명 직후 고향 창녕에서 민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박정희의 쿠데타로 의원생활은 단명으로 끝났다. 일가는 이 변두리, 닭 키우던 집에서 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생활력이 없는 독서인일 뿐이었다. 이곳에서 안암동까지 통학하던 대학시절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재일동포유학생 간첩단사건으로 1년간 서대문구치소에서 감옥살이를 한 것도 이 시절이었다. 1980년 결혼도 이 향동의 집에 살 때 했다. 이 닭장집을 처음으로 방문한 막 결혼한 신부도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천지개벽이라는 말은 알고 있지만, 내가 살던 향동이 이렇게 천지개벽되다니. 미스터 버티고 같은 책방이 문 열고 있다는 것이 경이롭습니다.”
박 선생은 이날 세 권의 책을 구입했다. 바트 어만의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와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윤석열 탄핵사건 선고 결정문』과 한강의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였다. 어느 책방을 가더라도 꼭 책을 사는, 서점과 서점인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독서인이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
김언호 한길사 대표

그날은 청명했다. 숲이 눈부신 오월의 오후, 서점인 신현훈과 독서가 박종일과 출판인 김언호는 향동천변의 작은 책방 미스터 버티고에서 책의 향기를 맡으면서 책을 예찬하는 것이었다. 저 지난 시절, 서울로 진입하지 못한 시골 사람들이 살던 변두리 마을, 향동의 그 풍경을 반추하면서. 책은 아름답고, 책은 재미있다. 책은 우리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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