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근의 동네서점기행
➊ 세리서점

일산 백석동에 자리한 세리서점.
일산 백석동에 자리한 세리서점.

[고양신문] 서점을 열었다. 서점을 열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그 이유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파편적인 기억 속을 더듬어 본다. 전주 남부시장 2층에 청년몰이 조성됐다. 같이 밴드를 하는 친구들과 전주로 단합대회를 갔다가 청년몰을 구경했다. ‘책방 토닥토닥’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서점은 책으로 빼곡했다. 사장은 계산대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꼭 책을 한 권 사가리라는 알 수 없는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내방 책장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한 권을 꺼내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좌이체로 결제했다. 카드결제가 아닌 현금결제를 해야 한다는 마음 역시 어디서 왔는지 기원을 알 수 없다. 


친구의 친구가 이대 앞에서 운영하는, 지금은 문을 닫은 ‘퇴근길 책 한 잔’에 놀러 갔다. 처음 보는 사람들 틈에 앉아 술을 마셨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이름을 가진 책을 샀다. 서점 사장한테 잘 보이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기울어진 세상에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만큼 서점 사장은 참 멋져 보였다.
고양신문 필진인 김경윤 선생은 일산의 ‘자유청소년도서관’의 관장이었다. 기꺼이 도서관 공간을 내어준 선생 덕분에 그곳에서 나와 고양에 사는 동료들은 술을 퍼마시며 떠들었다. 도서관 안에서 마시는 술은 참 달았다. 이따금 그곳에서 각자가 공부하고 있는 주제를 돌아가며 발표하며 서로를 배불렸다.


고양의 청년들과 ‘지하’라는 자치공간을 만들었다. 건물을 가진 동료의 아버지는 자신이 술을 담그는 공간으로 이용할 예정이었던 건물의 지하공간을 우리에게 양보했다. 경기도가 우리의 꾐에 넘어가 2000만원을 인테리어비로 지원해 줘 제법 근사한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공간에 모여서 동료들과 크고 작은 용역을 받아 수행했고 고양시를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삶의 무대로 만들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공간이 비는 날에는 당시 여자친구였던 지금의 아내와 와인을 마시며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그렇게 성사된 결혼식 후에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가좌동으로 이사했다. 


가좌동에서 주민자치회 위원을 했다. 마을을 걸어 다니던 어느 날 서점 ‘이랑’을 발견했다. 사장과 의기투합해 동네 사람들과 서점에서 가좌의 삶을 바꿔보자 외쳤다. 서점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모였다. 마을에서 함께 산책하고, 책을 읽고, 플리마켓을 열었다. 물건을 팔아 거둔 수익금의 일부를 빼돌려 가좌동 청소년들에게 책을 무료로 제공하는 일을 벌였다.


5월 26일 해질 무렵 나는 세리서점 창가 의자에 앉아 있다. 날씨가 좋았던 오늘은 두 명의 손님이 서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책은 팔리지 않았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발표에 따르면 성인 10명 중 6명은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 세리서점 문을 열고 넉 달이 지났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이 이어졌다. 책은 생각보다 많이 팔렸고 이러다가 잘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떴다. 서점을 열기 전 작가 조지 오웰의 『서점의 추억』을 읽었다. “우리한테 오는 손님 중 대다수는 어느 곳을 가든 민폐가 될 사람들이지만, 서점에서는 더 특별한 기회를 노리는 부류”라는 그의 말은 낙담보다는 기대를 품게 했다. 


서점을 연지 일주일쯤 지나 손님이 들어와 옆집 사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30년 전 중국에서 차(마시는)를 수입하던 일을 회상했다. “당시의 저는 차의 유행이 코앞에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직도 안 왔네요” 소설만큼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얼마나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을까. 그는 마음에 드는 공간이 생겼는데 곧 이사를 앞두고 있어 아쉽다며, 다음에 방문할 때는 집에 있는 좋은 차를 선물로 주겠다고 했다. 


그랬다. 그래서 서점을 열었던 것이다. 모든 개체가 그렇듯 공간은 중력을 가진다. 중력에 끌려버린 사람들은 모이면 떠들며 짙거나 흐린 관계를 맺는다. 관계는 작당을 하고 쓸모가 있건 없건 뭐든 해낸다. 찾아보니 남부시장의 서점은 여전히 영업 중이다. 이대앞 서점은 문을 닫았다. 김경윤 선생은 가파도로 가버렸다. 공동체 공간을 표방하며 만든 지하는 함께 만든 청년들이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며 문을 닫았다. 나의 주민자치회 위원 임기는 끝났다. 나는 서점을 열 공간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산을 드나드는 관문이라 생각한 백석역 인근에 서점을 열어 책을 팔고 있다. 여러분, 책을 사러 오시고 당신들의 이야기도 들려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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