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PD의 맛집 탐구 ➋ 돈가스에서 ‘돈카츠’로
일본인에게 고기먹이려 고안된 튀김 조리법
두툼한 고기 숙성한 ‘돈카츠’ 미식가 입맛 저격
망원동 ‘헤키’ 촉촉한 육즙 부드러운 식감 으뜸
[고양신문]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 라는 말이 있다. 돈가스는 돼지고기에 빵가루 등을 입혀 기름에 튀겼으니 편식하는 어린이들도 맛있게 먹는다. 학교 급식, 기사 식당, 동네 분식점, 재래시장 등에서 노릇하게 튀겨져 나오는 돈가스는 언제나 군침 돌게 만드는 가장 대중적인 음식. 남녀노소 불문 한국인 모두에게 친숙한 이 돈가스는 잘 알다시피 일본에서 건너왔는데 그 시작은 우리 입장에서는 좀 껄끄러운 일본의 근대화 역사와 깊이 관련 있다.
일본은 오랫동안 육식을 금지하는 사회였다, 7세기 후반 일왕이 육식 금지령을 내렸는데 그 배경에는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영향과 농사 지을 때 필수인 소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설 등이 존재한다. 250년 간의 평화를 누린 에도 막부의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는 동물 애호가로 유명한데 그는 1687년 아예 동물 살생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으니 육식은 일본인들에게서 더 멀어지게 된다. 1200년이나 유지되던 육식 금지 풍토는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도쿄 앞 바다에 나타나 일본의 개항을 강제로 요구하면서 변화의 계기가 마련된다. 이후 서양 열강과의 강요된 접촉을 통해 일본인들은 앞선 과학에 기반한 서구의 막강한 군사력에 놀라고 서양인들의 큰 체격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일본인들은 서양인들처럼 고기와 우유를 많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메이지유신 이후인 1872년 드디어 육식 금지령이 해제된다.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일왕의 궁궐에 침입할 정도로 육식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했는데 당시 일본인들에게 고기를 먹이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 바로 튀기는 조리법이다. 일본 돈가스의 시작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채소와 생선 등을 튀겨서 먹는 덴푸라를 좋아했는데 이를 고기에 적용한 것.
돈가스라는 이름은 고기에 빵가루 등을 입혀 버터로 튀기듯 조리한 서양 음식인 커틀릿의 일본식 발음 가쓰레스에서 비롯됐다. 돼지고기가 재료이니 돼지 돈에 가쓰레스를 줄인 말인 가스가 붙어서 1920년대 후반부터 돈가스라는 명칭이 정착되기 시작했고 바다를 건너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 경성의 백화점 내 서양식 식당에서도 제공된다.
<역사저널 그날> 연출 당시 1930년대 경성에서 유행한, ‘모던보이’와 ‘모던걸’로 상징되는 서구식 소비문화를 다룬 적이 있는데 당시 엘리트들은 화신백화점 양식당에서 돈가스를 먹고 재즈가 흐르는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곤 했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 돈가스는 1970년대 이후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고기 요리를 먹는 경양식 식당이 대표 외식 공간으로 각광받으면서 특별한 날에 모처럼 맛보는, 짜장면보다 더 고급스러운 외식 메뉴가 되었다.
그러나 경제 성장으로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경양식 돈가스의 위상은 추락하게 된다. 제대로 된 스테이크를 제공하는 레스토랑이 늘어나자 고급 외식 메뉴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렸고 냉동 돈가스가 보급되면서 집에서도 간편하게 조리해 먹는 음식의 대명사가 되고 만다. 튀겼으니 맛있는 것이지 고급 조리법이 동원된 일품요리는 아니고 자주 먹으면 기름 맛에 질리는 음식이기에 나 역시 엄청나게 푸짐한 크기와 양, 또는 매운 맛을 내세운 돈가스 식당 정도만 단지 호기심에서 드물게 찾아갈 뿐이었다.
돈가스가 너무도 식상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줄 서서 먹는다는 돈가스 식당 소문이 들렸다. 바로 홍대 부근 상수역 근처 사모님돈가스였다. 2015년에 시작된 미식 프로그램 <수요미식회> 초기 방송에 소개될 정도로 홍대 지역을 대표하는 인기 맛집이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려 맛본 그곳의 돈가스는 튀김 맛이 전부였던 기존 돈가스와 달랐다. 튀김옷 안의 고기가 두툼해 스테이크를 먹는 것 같은 느낌에 돈가스의 대표 소스 데미글라스 소스와 함께 크림 소스가 추가되면서 고소함이 극대화된 맛이 좋았다. 그 후에도 한 시간이 넘는 대기 시간을 여러 번 기꺼이 감수하며 지인들을 끌고 가곤 했다. 그만큼 두툼한 돼지고기를 씹는 맛은 기존에 먹던 경양식 돈가스와 차별화된 경험이었다. (4년 전 연희동으로 이전한 사모님돈가스는 얼마 전인 5월 15일 영업을 종료했다)
돈가스의 본고장 일본에서는 두툼한 ‘돈카츠’가 이미 1950년대 이후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경양식 돈가스는 일본에서는 50년대 이전에 먹던 방식의 돈가스였다. 고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연육기가 개발되면서 굳이 망치로 두들겨 얇고 넓게 펼 필요가 없어지면서 일본의 돈카츠 식당들은 두툼한 고기를 숙성시킨 남다른 육질로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있었다. 일본 여행 간 사람들에게 일본식 돈카츠는 라멘, 초밥과 더불어 반드시 먹고 와야 할 일본 현지 음식 중 하나였다. 그러자 일본 식당에서 현지 돈카츠를 배워 온 이들에 의해 한국에서도 경양식 돈가스가 아닌 두툼한 일본식 ‘돈카츠’ 식당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중 내 입맛에 가장 맞는 곳이 망원동 헤키이다. 헤키의 김민성 셰프는 일본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현지 식당에서도 일해 본 경험을 살려 6년 전 돈카츠 식당을 개업했다. 수비드 공법으로 돼지고기를 조리해 일주일간 콜드스모크 숙성 과정을 거친다.
헤키 바로 근처에 거주하는 후배의 추천으로 처음 가서 맛본 헤키의 히레카츠(14,500원)는 놀라웠다. 촉촉한 육즙이 가득한 안심은 그냥 입에서 녹는 느낌. 입에 넣자마자 완전 넥스트 레벨의 찐맛집이란 생각이 단박에 들었다. 연한 핑크빛이 도는 히레카츠 단면은 식욕 자극과 함께 사진을 부르는 비주얼이기도 하다. 등심덧살이 들어간 상로스카츠(17,500원) 또한 근지방이 적절하게 있어 고소한 맛이 최고이다. 식탁마다 비치된 트러플 오일과 히말라야 소금과 함께 먹으면 풍미는 더 깊어진다. 돼지고기 안심과 등심에서 이런 맛들을 느끼게 되다니 신세계를 경험한 기분이 들 정도. 첫 방문에서 히레카츠와 상로스카츠에 반한 이후 두 번째 방문에서는 닭고기 안심으로 만든 토리카츠(15,000원)를 맛보았다. 입에 넣자마자 역시 느껴지는 부드러운 식감에 감탄사가 나왔다. 그날은 무척 추운 날이라 밖에서 대기하느라 힘들었는데 그 고생이 금세 잊혀지는 맛이었다.
내 경우 맛집이라고 소문난 식당 중 가서 먹어 보면 맛집이라고 충분히 동의되는 경우가 30% 이하이고 그중에서도 여기는 정말 다른 곳과 차별화 되는, 넥스트 레벨이라고 여겨지는 곳은 드문 편인데 내 입맛에는 헤키가 그 드문 곳 중 하나이다. 월, 화는 휴일이고 보통 한 시간 이상 대기를 해야 하나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
헤키 외에도 일본식 돈카츠로 유명한 곳이 최근에 많아졌다. 대학로 지하 매장에서 시작한 정돈은 2019년 홍대점 오픈 등 이미 여러 곳에 분점을 둘 정도로 각광을 받는 맛집. 2020년 6월 제주 출신 김지훈 대표가 서울역 뒤편 대로변에 문을 연 오제제 또한 급속도로 인기를 얻은 돈카츠 맛집이다. 동업자가 일본 우동 학교 출신이라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문 녹색의 자루우동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역시 여러 곳에 분점을 두고 있다.
이 밖에도 서울 홍대권인 서교동 카츠카와, 합정동 크레이지카츠, 상수역 이츠야 등도 유명하고 고양시에서는 일산 웨스턴돔 2층에서 만돈이 성업 중이다.
이렇게 일본의 서구화, 근대화 과정에서 탄생한 돈가스는 한국으로 건너와 분식집 레벨의 가장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는 동시에 최근에는 숙성된 돼지고기의 맛을 보여 주기도 하는 두 가지의 길을 걷고 있다. 한일 양국의 근대화 과정을 생각하며 돈가스 투어를 해도 재미있을 듯 한데 고양시민들은 가까운 만돈에서부터 시작해 보는 걸 추천한다. 헤키에서 시작하는 건 비추. 너무 고점에서 시작하면 나중에 맛보는 다른 곳이 시시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입맛은 각자 취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