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곤의 손에 잡히는 책
(2) 모든 것은 빛난다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 통해 삶의 의미 되찾기
대중교양서 외피에 담긴 철학책
'뉴욕타임스' 서평 읽고 곧바로 계약
[고양신문] 최근 10년 사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책을 들고 싶다. ‘사월의책’에서 낸 『모든 것은 빛난다』라는 책이다. 자사의 책을 소개하는 데 따르는 이해충돌의 위험과 의심의 눈길이 따갑게 느껴지고, 사적으로나 공적 매체에서 이미 여러 번 책을 소개한 데 따른 거리낌도 없지 않지만, 이 꺼림칙한 기분은 모두 무시하기로 한다. 좋은 책을 소개하려는 목적에서는 조금 뻔뻔해도 되지 않을까.
이 책을 출간하기로 처음 마음먹은 것은 10여 년 전 ‘뉴욕타임스’의 북리뷰 기사를 읽고서였다. ‘뉴욕타임스’는 주말판으로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북리뷰를 발행하는데, 이 매체의 메인 지면은 출판기획자라면 무시할 수 없는 기획 소스이다. 1면에 실린 찬사 일색의 서평을 읽고 바로 책을 계약했고, 원서로 한 번, 번역원고를 원서와 일일이 대조하며 또 한 번, 그리고 2교, 3교를 거치는 교정 과정에서 다시 몇 번. 이후로도 몇 차례나 이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내가 가끔 떠올리는 생각이 내 생각인지 이 책에서 나온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책의 저자는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그의 제자인 숀 켈리라는 두 사람이다. 휴버트 드레이퍼스는 미국에서 하이데거 현상학의 일인자로 평가받는 철학자이고 숀 켈리는 하버드대 철학교수로 재직하는 학자인데, 아마도 책의 뼈대는 드레이퍼스가, 그리고 고전에서 길어낸 풍부한 문학적 전거와 대중적인 필치는 숀 켈리의 몫이 아닌가 추측한다.
‘현상학’이니 ‘하이데거’니 하면 벌써부터 사람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도망치려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 솔직히 말해서 책은 그리 쉽지 않다. 현대 철학의 주요 흐름 가운데 하나인 현상학의 관점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탓이다. 그러나 현대 철학의 난해한 주장을 알지 못해도 책의 주된 논지를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다. 대중교양서의 외피를 쓰고 출간된 이 철학책은 그해 연말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이 책은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라는 부제처럼 서양 고전들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를 하나하나 밝혀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 사도 바울의 서한들, 단테의 『신곡』, 허먼 멜빌의 『모비 딕』, 그리고 현대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소설 등이 이 책에서 다루는 서양 고전들인데, 이 위대한 작품들을 빼어난 저자들의 해설로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도 가외의 소득이다.
책의 첫 페이지에는 뉴욕 지하철에서 의식을 잃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보고 망설임 없이 선로에 뛰어들어 그를 구한 흑인 노동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노동자는 다급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고 그냥 ‘저절로’ 행동했다고 말한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도 아니요, 무슨 계산을 하고 뛰어든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 제공자 중 한 명인 헬레네는 전쟁이 끝난 후 뻔뻔하게도 원래 남편에게로 돌아간다. 손님들이 모인 잔치석상에서 그간의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고, 심지어 남편에게 이런 칭송까지 듣는다. “훌륭한 이야기예요 내 사랑, 그대가 한 말은 모두 도리에 맞는 말이오.”
단테의 『신곡』에서는 지옥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간 단테가 목격한 그곳 장면이 묘사된다. 지옥은 의외로 화염으로 불타는 고통의 감옥이 아니라 꽁꽁 얼어붙은 채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는 영혼들의 장소였다. 지옥의 요새도 그들을 가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지은 유폐의 공간이었다. 신의 사랑에서 도망쳐 얼음처럼 굳어버린 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모비 딕』의 주인공 에이해브 선장은 자기 과신과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이다. 스스로 영웅이 되고자 한 그는 그 크기와 힘조차 가늠되지 않는 모비 딕에 작살을 꽂고 피쿼드 호와 함께 장렬하게 바다 밑에 가라앉는다. 그의 최후는 한없이 부풀어 오른 한 자아의 파국이었다.
이 이야기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저자들은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은 고전들의 내용에서 한 가지 놀라운 메시지를 추려낸다. 그것은 주어진 외부 상황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방식을 통해서 우리들 인간이 의미를 얻고 살아가는 방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왜 우리들 현대인은 무의미와 허무에 시달리게 되었는가?
저자들은 근대의 ‘개인’이 탄생하기 전 옛사람들이 살아가던 방식과, 전례 없는 자유와 함께 그만큼이나 무거운 책임을 떠안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람들을 극명하게 대비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자아’라는 하나의 이념에 충실한 나머지 이제는 어디서도 쉽게 ‘의미’를 구하지 못하는 부실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칸트가 “너는 너의 준칙이 하나의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개인의 자율성과 자기 입법의 능력을 선포한 이래, 개인은 근현대인의 불가침의 영역이 되었다. 『모든 것은 빛난다』의 저자들은 그 전조가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고해성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정결해졌다는 자만심을 스스로 뉘우치며 다시 교만함의 죄를 고백하러 되돌아간 젊은 신부 마틴 루터가 그러하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게서 ‘의미’를 완성하려던 인물이었다. 그의 고해신부가 그랬단다. “이따위 일로 자꾸 나를 찾아오지 말고, 어디 가서 살인이라도 하고 오게.”
호메로스가 그려낸 헬레네는 전혀 다른 인물형이다. 그녀에게는 자아의 결백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고, 오로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명하는 대로 그때그때 신의 뜻에 자신을 조율하여 사는 것이 인간의 ‘탁월함’(아레테)에 도달하는 길임을 아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은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 던진 여섯 개의 창을 하나도 맞지 않은 오디세우스처럼 신의 가피를 받는다.
『모든 것은 빛난다』는 우리가 무의미와 허무의 삶을 살게 된 이유를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뉴욕 지하철의 영웅처럼 끊임없이 바깥 세상에 자신을 조율하며 사는 이는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지 않아도 세상이 던지는 의미가 그를 ‘통과하여’ 발한다. 반대로 세상의 의미를 스스로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 이는 에이해브 선장처럼 자기 과신과 아집의 화신으로 결국 무의미의 바다로 추락할 뿐이다.
우리는 모두 가볍든 무겁든 일정 정도 자아비대증에 시달린다. 내가 그것을 해야 하고, 나를 위해 세상은 돌아가며, 내가 없으면 안 된다. 모든 이가 나만 바라보는 것 같다. 이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저자들은 ‘자아’라는 단독자가 투영되어 만들어진 유일신의 세상과, 수많은 의미가 서로 경쟁하며 인간을 이끄는 다신주의 세상을 비교한다. 의미의 천국은 멀리 있지 않다. 도덕이나 이념이 우리 삶에 의미를 던져주는 것이 아니다. 아침에 아무런 의무감 없이 타놓은 커피 한 잔에서 삶의 기쁨을 맛보는 이들은 ‘세상’이라는 이름의 수많은 신들이 건네주는 작은 의미를 만끽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자기에게서 벗어나 바깥 세상에 안테나를 맞추고 사는 이들에게는 아름다운 의미의 전파가 잡힌다.
이 책 말미에는 세상의 빛나는 것들을 찾아 길을 떠난 두 제자가 나온다. 빛나는 것들을 찾지 못해 실망한 제자에게 다른 제자는 말한다. “모든 것이 빛나는 건 아니지. 하지만 더없이 빛나는 것들만이 있는 법이라네.” 이 알쏭달쏭한 말과 함께 그 빛나는 것들을 보는 법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책은 말한다. 책의 공저자 중 한 명인 휴버트 드레이퍼스는 2017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뛰어난 철학적 저술 몇 권과 함께 말년에 이 책을 우리에게 남기고 떠난 드레이퍼스 교수의 명복을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