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가파도 편지 17
[고양신문] 고양과 가파도의 거리, 당신과 나의 거리, 거리는 물리적인 숫자보다 훨씬 깊은 철학의 말입니다. 멀어졌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지요. 서울에서 가파도까지, 직선거리로는 469㎞. 비행기와 배를 갈아타는 여정은 하루가 걸립니다. 하지만 진짜 거리는 그보다 깊었습니다. 60년 도시의 삶과 섬의 삶 사이에 놓인 시간의 거리, 소음과 고요 사이의 감각적 거리, 그리고 내가 알던 나와 이곳에서 만난 나 사이의 존재론적 거리. 그 거리를 생각합니다.
플라톤은 철학적 사유의 시작을 '거리두기'라고 했습니다.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볼 때 비로소 사유가 시작된다는 것이지요. 나는 평생 그런 말들을 읽고 글로 썼지만, 정작 내 삶에서 실천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몸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가파도에 도착한 첫날, 섬의 공기는 도시와 달랐습니다. 짙은 소금 냄새와 바다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습니다. 선착장 앞 작은 건물이 매표소였습니다. 매일 내가 일할 곳. 창구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자리. 그곳에서 나는 떠나는 사람들과 도착하는 사람들을 매일 만나게 됩니다.
거리는 단절이 아니라 연결의 다른 방식입니다. 멀어짐으로써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을 나 자신의 모습, 삶의 본질, 시간의 흐름. 이 섬에서의 2년은 내게 그런 '거리의 철학'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거리'를 배우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과거와 현재 사이의 거리, 욕망과 만족 사이의 거리.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나 사이의 거리. 내가 알던 나와 이곳에서 만난 나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고 있습니다. 환갑의 나이에 시작한 이 여정은 쉽지 않습니다. 몸은 불편함을 느끼고, 마음은 가끔 흔들립니다. 하지만 이 불편함과 흔들림이 오히려 나를 깨웁니다. 편안함 속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었던 진실을 마주하게 합니다.
매일 아침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나서 매표소로 출근합니다. 바다를 마주하며 걷는 그 짧은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순간입니다. 파도는 항상 같은 듯하지만 매일 다릅니다. 오늘은 잔잔하고, 내일은 거칠고, 모레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매표창구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각기 다릅니다. 설렘, 기대, 피로, 아쉬움…. 그들의 얼굴에서 인생의 다양한 순간들을 읽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내란과 탄핵과 대선. 우리가 이 모든 일을 겪었습니다. 그때 나는 가파도에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당장이라도 광장으로 달려가고픈 마음을 누르고, 불면의 밤과 출근의 아침과 외로움의 저녁을 보내야 했습니다. 안타까움으로 가슴 졸이며 마치 외국에 있는양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구호와 글과 동영상이 어두운 하늘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모든 것들이 꿈처럼 아득합니다. 이제 편안하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선착장에 도착한 관광객의 표정이 환하고 편안합니다. 물론 내 마음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니 한계가 있습니다만, 나 역시 그 표정을 보고 환해집니다. 다시 일상의 거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가슴 졸이던 나를 위무하고, 친절함으로 관광객을 응대합니다. 그들과 나 사이의 가까움과 먼 거리를 의식하면서, 그리고 그 거리감을 편안하고 안타까워하면서. 이 글은 가파도에서 쓰고, 고양신문을 통해서 읽히겠지요. 그 거리를 늘 의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