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젊은 부부들과 아이들이 손모내기하는 풍경
젊은 부부들과 아이들이 손모내기하는 풍경

[고양신문] 유월 초, 여주에서 모내기를 끝내고 아흐레 만에 농장에 왔더니 장관도 이런 장관이 없다. 깔끔하게 관리된 회원들의 밭과는 달리 내 밭은 무릎에서 허리 높이까지 자란 풀들이 온통 점령을 해버려서 어디가 두둑이고 고랑인지 아, 장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도 여주에서 진을 다 빼고 올라온 탓에 좀체 밭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그대로 집으로 발길을 돌려 중천에 걸린 해가 다시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곯아떨어졌는데도 온몸은 그야말로 천근만근 내처 자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전날 본 텃밭 풍경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서 어금니를 질끈 깨물며 자리를 털고 억지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농장에서 막걸리를 반주 삼아 늦은 점심을 먹은 나는 누군가 망쳐놓은 나라 꼴 같은 텃밭을 망연자실 쳐다보며 담배를 몇 대 연달아 태운 다음 농사 방석과 낫을 챙겨서 일단 스물다섯 평에 달하는 땅콩밭에 앉았다. 활짝 편 손바닥 같은 땅콩이 다치지 않도록 신경을 써가며 김매기를 하다 보니 시간은 곱절 걸리고, 한 시간은 좋이 구슬땀을 쏟아내고 나니 핑 어지럼증이 일었다. 

미련하게 고집부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느티나무 그늘 밑으로 피신을 했다. 오 년 전만 해도 한여름 땡볕 아래에서 세 시간을 쉬지 않고 쇠스랑질을 해도 그다지 힘든 줄을 몰랐는데 새삼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나이가 들수록 주변에 아픈 벗들이 하나둘 늘어가고 나 역시도 해거름이 되면 팔꿈치와 손목이 시큰거려서 파스 붙이는 일이 잦아졌고 쉬는 시간도 곱절 늘었다. 

멀끔해진 생강밭
멀끔해진 생강밭

문득 여주에서 만나 함께 일했던 고등학생이 떠오른다. 녀석은 대안학교 고3 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 진행하는 교육과정에 따라 여주에서 두 달간 우리와 함께 숙식하면서 벼농사를 지었는데 그 일솜씨가 만만치 않았다. 열아홉의 체력은 지칠 줄 몰랐고 일을 습득하는 속도도 어찌나 빠른지 성인 두세 명의 몫을 너끈히 해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건 녀석과 함께 일을 하면 고되기 짝이 없는 농사일이 한결 수월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중간에는 다른 대안고등학교에서 온 고2 여학생 둘이 합류해서 보름간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시간이 여간 즐겁지 않았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떠나버리자 그 빈자리가 어찌나 큰지 사나흘 동안 일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서 내심 애를 먹었다. 

손모내기 행사를 할 때는 오십여 명이 참여를 했는데 그 가운데 절반은 아이들이었다. 적막하기만 했던 논에 아이들이 들어가자 까르르 쉬지 않고 터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마을이 다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체험을 마친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꾀꼬리 소리도 공허하고 적막하게 들렸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농장을 운영하면서 가장 신나고 즐거웠던 순간은 청소년들이나 젊은 사람들과 함께 밭을 일궜던 장면들이다. 

나는 씁씁한 입맛을 다시며 끙, 몸을 일으켜 다시 밭으로 들어갔다. 땅콩을 구출하고 울금밭으로 향하는데 저 많은 풀을 언제 다 매나 아뜩한 가운데서도 준치는 썩어도 준치라고 밭이 빠르게 환해진다. 그러나 나이가 나이인지라 점차 숨이 가빠지고 일손은 자꾸만 느려진다. 이래서 농사는 젊은 사람이 지어야 하나보다. 

나는 여전히 농부가 공무원이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새로 출범한 정부에서 젊은 사람들이 농사를 업으로 삼을 시금석을 놔주면 얼마나 좋을까 조심스레 꿈을 꾸어본다. 
 

김한수 소설가
김한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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