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종 기자의 하루여행] 파주·연천 한국전쟁의 흔적
영국군 설마리전투, 미 공병대 건설 리비교
머나먼 이국땅 적신 참전국 장병들의 피땀
북녘땅 바라보는 ‘북한군묘지’ 쓸쓸한 풍경
[고양신문] 모든 전쟁은 참혹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러-우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있는 북한군의 사례에서 보듯, 타국의 전쟁에 참전한 이들의 희생은 더욱 비극적이다. 76년 전 우리 땅에서 발발한 6·25전쟁에도 16개 나라 군인들이 유엔군 이름으로 참전했었고, 적잖은 희생이 뒤따랐다. 고양과 가까운 파주와 연천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유엔군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 장소가 몇 곳 있다. 이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도 한국전쟁의 참상과 교훈을 입체적으로 되새기는 방법 중 하나다.
밀려오는 중공군 맞서 “임진강 전선 사수”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파주 적성 ‘영국군 설마리전투 추모공원’이다. 공원은 파주의 유명 관광지인 감악산 출렁다리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산기슭을 감싸고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호젓한 곳이지만,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선 영국군의 어마어마한 희생이 있었다. 1·4 후퇴로 전쟁이 수세로 전환된 1951년, 수도권 방어를 위해 임진강 전선을 사수하던 영국군 글로스터 연대가 남하하던 중공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수적 열세와 후방의 지원이 차단된 불리한 상황에서도 영국군이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나흘간 용맹하게 중공군과 맞선 덕분에 적군의 수도 서울 진격이 지연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영국군은 부대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큰 희생을 치렀다.
잊혀서는 안 될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2014년 국가보훈부와 경기도·파주시가 영국 글로스터 연대 장병들이 최후의 결전을 치른 장소 일대에 ‘영국군 설마리전투 추모공원’을 조성했다. 공원에는 글로스터 연대 장병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다양한 조형물이 설치됐다. 영국군의 상징인 베레모를 중심으로 기념석과 설명문이 배치된 광장도 둘러볼 수 있고, 유엔 참전국 국기를 배경으로 영국군 소대원들이 전선을 행군하는 동상도 만날 수 있다. 기자가 방문한 날 ‘글로스터 영웅들’이라는 추모시가 새겨진 제단 위에는 한 고등학생이 남긴 엽서가 동백꽃송이와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공원 둘레에는 단풍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방문객들이 벤치에 앉아 느긋한 휴식을 즐기기에 좋다.
추모공원을 찾았다면, 뒤편 시냇물을 건너 1957년 만들어진 ‘영국군 참전기념비’도 꼭 찾아가보자. 자연석을 제단처럼 쌓아 올려 만든 투박한 기념비이지만,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군과 영국군이 힘을 모아 만들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는 훨씬 큰 기념물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국빈이나 참전용사 유족들이 한국을 찾으면, 반드시 들러서 손수건을 적시며 묵념을 올리는 곳이 바로 ‘영국군 참전기념비’ 앞이다.
우뚝한 굴뚝 여전히 남은 유엔군 화장장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유엔군 시신은 어떻게 처리됐을까? 국제법상으로는 원칙적으로 본국으로 송환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전세가 뒤바뀌는 치열한 전쟁 통에 그런 원칙을 지킬 여유가 없었다. 곳곳에서 유엔군 전사자들이 속출했고, 이들의 시신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해 임진강 남쪽 연천군 미산면 언덕 기슭에 만들어진 것이 ‘연천 유엔군 화장장 시설’이다. 1952년 건립된 화장장은 휴전 이후에도 한동안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무너져 내리고 방치되다가, 2008년이 되어서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며 주변이 정비됐다.
건물의 지붕은 물론, 벽체도 대부분 무너져 내렸지만, 화장장의 상징적인 시설인 우뚝 솟은 굴뚝이 그대로 남아 방문객들에게 인상적인 경관을 제공하고 있다.
벽체는 일정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돌덩이를 시멘트를 발라 허튼층쌓기로 만들었다. 무너진 잔해를 살펴봐도 철근 한 가닥 눈에 띄지 않는다. 시간적 여유도, 건축자재도 턱없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서둘러 지은 건물임을 고스란히 방증한다. 한국전쟁 유적으로의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낯선 땅에서 눈을 감은 유엔군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장소로서의 의미도 좀 더 조명되어야 할 것 같다.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원혼들
유엔군 전사자는 아군이니까 예우가 당연했다면, 적군인 북한군과 중국군(당시는 인민군과 중공군으로 불렸던) 전사자들의 사정은 어땠을까? 대개의 사람들이 존재 자체를 모르는 또 하나의 역사 현장이 바로 ‘북한군 묘지’다. 조성 당시 이곳은 한국전쟁에서 수습한 북한군과 중국군 유해를 안장했다. 휴전 이후에는 남한을 침투했다 사살된 ‘무장공비’들도 묻혀 있어 오랜 세월 동안 ‘적군묘지’라는 무서운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2014년 중국군 437명의 유해가 본국으로 송환됐고, 공식 명칭도 ‘북한군묘지’로 바뀌었다.
전쟁 상대국 전사자의 묘지를 국가에서 조성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경우인데, 어떤 이유로 만들어지게 된 것일까? 아무리 적군으로 대치했다 해도 남과 북은 한 형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 더 실질적인 이유는 휴전 이후 북한 정권이 남한에서 사망한 전사자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북에서 전사한 국군의 시신도 되돌아오지 못했다. 이민족끼리의 전쟁보다도 더 심한 증오로 오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전쟁은 상대를 비인간화하는 것을 전제로 성립한다. 하지만 죽음은, 군복의 색깔과 상관없이 모두를 존중받아야 할 존재로 되돌려놓는다. 비록 별다른 추모나 장식의 흔적을 일체 생략하고, 수습된 시신의 이름과 계급, 전사한 날짜와 장소만을 손바닥보다 조금 큰 묘석에 줄 맞춰 새겨놓았을 뿐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묘석 중에는 ‘무명인’도 있고, 여러 구의 시신을 숫자로 가름한 것도 많다. 그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배치를 보고 있노라면, 적군 시신에게 할애할 수 있는 존중의 최소치가 ‘딱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듯하다.
대개의 묘지는 대개 남향으로 조성하지만, 이곳 북한군 묘지는 잠든 이들이 두고 온 땅을 바라보도록 북향을 하고 있다. 관리의 손길이 덜 미친 까닭인지, 주변을 가득 덮은 개망초가 묘역 안쪽까지 잠식해 들어왔다. 어릴 적 계란꽃이라 불렀던 개망초는 사실 개화기 이후 우리 땅에 들어와 지금은 마치 토착식물처럼 친숙해진 풀이다. 무람없이 만개한 개망초꽃이 북한군묘지의 묵직한 적막을 화사하게 감싸준다.
전쟁도 새월도 견뎌낸 유일한 다리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임진강을 가로질러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와 진동면 용산리를 잇는 ‘리비교’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공병부대가 임진강을 따라 건설한 11개의 다리 중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다리가 바로 리비교다. 대부분의 다리들이 임진강의 거센 물살과 세월의 풍상을 못 견디고 유실되었지만, 리비교만큼은 I자 형태의 강철 빔을 골조로 사용해 기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리의 이름은 한국전쟁에서의 영웅적 희생으로 명예훈장이 수여된 조지 리비 중사를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세월이 흐르며 리비교 너머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는 타 지역으로 이전했고, 노후된 리비교도 10여년 전 대대적인 보강공사를 마치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개통했다. 국방부로부터 교량 소유권을 넘겨 받은 파주시는 넓고 쾌적한 리비교 문화공원을 조성해 한국전쟁의 소중한 역사 유산인 리비교와 임진강 하구의 탁 트인 풍광을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다리 건설에는 미군 공병대 외에도 한국인 카투사, 용접공, 잠수부, 목수 등 다수의 한국인들의 피와 땀이 보태졌다고 한다. 전쟁 중에 진행된 위험한 다리건설 작업은 그 자체로 전투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투입됐던 장병과 노무자들의 흔적은 리비교 문화공원에 전시된 교각과 강철빔 표면의 낙서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한글과 영어, 한자가 골고루 등장하는 낙서에는 이름과 부대를 써넣기도 했고, ‘수고했다’는 격려를 남기기도 했다.
가장 인상깊은 낙서는 보일 듯 말 듯 끄적여놓은 어느 이름모를 병사의 시다. ‘다 글렀다. 이제는 청춘도 꽃다운 시절도 꿈같이 흘렀어라’며 허무한 어조로 시작한 시는 ‘차라리 고뇌와 피투성이에 젖은 이 몸을 이 강물 위에 던져 피세에서 나의 행복을 구하면 어떠리’라며 한계에 다다른 절망감을 토로한다. 하지만 ‘단 한번이라도 그대와 만나고저 살고 잇소’라며, 살아야 하는 작은 끈 하나를 심중에 붙들어놓는다.
무명 용사의 시를 가슴에 새기고 발길을 전망대로 향하니, 산뜻한 모습으로 단장한 리비교와 70여 년 전 펼쳐졌던 참상들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임진강 강물이 한눈에 조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