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비슷한 거 하는 M세대의 글쓰기>

대화천 산책로 풍경 [사진=김수지]
대화천 산책로 풍경 [사진=김수지]

[고양신문]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도 어느덧 스무날이 넘어갑니다. 그사이 저는 또 하나의 공모전에 응모했고, 이젠 만으로도 햇수로도 빼도 박도 못하는 마흔이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미 육군 창설 기념이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트럼프 대통령 생일 축하 기념이라던 615억짜리 열병식을 보다가 그와 제가 같은 날 태어났음을 깨닫고 더없이 우울한 날들을 보내던 중입니다. 그 전까지는 체 게바라와 생일이 같음을 기뻐하며 은밀하게 이날을 혁명가들의 날로 기념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마흔’과 ‘트럼프’가 저를 바닥 모를 우울로 밀어 넣은 것은 아닙니다. 한 달간의 황홀한 여행을 마치고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섰을 때 저는 어떤 얇은 막이 제 예민한 살갗을 뒤덮은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집에서 며칠 보낸 후에야 그 막의 정체를 알게 됐는데, 그것은 ‘갇혀 있다’라는 감각입니다. 그 숨 막히는 감각은 대화천 천변을 걸을 때만 간신히 걷혔습니다. 그러나 그곳까지 가려면 아스팔트 불길을 30분이나 걸어야 합니다. 그 사이엔 건널목 네 개와 대로 하나가 가로지르고, 자욱한 매연과 오토바이의 곡예 운전까지, 고작 길 하나를 걷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난관이 혹독합니다. 그래서 보통은 역 근처 10분짜리 산책로를 걷다가 옵니다. 

호모 비아토르, “길 위의 인간”이라는 정의에 걸맞게 저는 지난 한 달간 길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홉 시간씩 글을 썼던 땅끝마을에서도 매일 두 시간씩 해변을 걷고 숲속을 헤맸습니다. 그렇게 발끝에 집중해 걷다 보면 정신을 뜨거운 물로 샤워한 것처럼 시야가 맑게 걷힙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뿐만 아니라 쓰는 사람에게 걷는 일은 의식처럼 수행되는 일과입니다. 책상 앞을 떠나지 않을 것 같은 한강 작가도 매일 천변을 걷는다 했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걷기를 넘어 뛰기의 달인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작가들이 이토록 진지하게 걷고 뛰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오래 쓰기 위해서입니다. 쓰는 일 역시 결국 몸이 하는 일이기에 책상 앞에 종일 구겨놓은 몸을 매일 펴주지 않으면 허리와 어깨 통증으로 이내 글을 쓸 수 없게 됩니다. 말하자면 걷는 일은 가장 비싼 글쓰기 연장을 관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우리는 일고여덟 시간씩 걷고 뛰며 사냥을 하던 원시 인류의 후예입니다. 걷는 일은 우리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인 겁니다.

대화천 산책로 풍경 [사진=김수지]
대화천 산책로 풍경 [사진=김수지]

그런데 제겐 이 본능이 유난히 맹렬하게 새겨진 듯합니다. 한 달 동안 장엄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원 없이 걷다가 역 근처에 짧게 조성된 산책로를 걸으니 호모 비아토르가 아니라 아크릴 케이지 속 햄스터가 된 기분입니다. 그러나 성공적인 도시인이 되려면 대체로 책상 앞에 앉아 있고 간혹 인공 조형물 위를 걷는 생활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케이지 속 햄스터와 내가 뭐가 다른가, 하는 자각이 들 때마다 소파에 앉아 달콤한 음식과 자극적인 영상으로 사유가 발전해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만일 마천루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성공한 햄스터의 이야기를 쓴다면 성공한 도시 작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긴 여행이 제 안의 무언가를 일깨운 것인지, 빨간 약을 먹은 네오처럼 자꾸만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없이 큰물을 보고 심연처럼 깊은 숲을 걸었더니 아크릴 속 햄스터로 사는 생활이 숨 막힙니다. 햄스터가 외제 차를 몰고 부동산을 몇 채 소유한 게 뭐 어쨌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성공한 도시 작가가 되기는 그른 것 같습니다. 어차피 그른 거 케이지를 벗어나 원 없이 걸어나 봐야겠습니다. 그러면 성공한 작가는 못 돼도 성공한 하루를 산 사람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쓴 글에서는 비 갠 후의 풀 냄새가 날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영화 <매트릭스>를 모른다고 하여 부연하자면, 빨간약은 암울한 진실을 볼 수 있게 하는 약입니다.

대화천 산책로 풍경 [사진=김수지]
대화천 산책로 풍경 [사진=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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