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풀꽃이야기ㆍ2
칡과 등의 꼬임이 빚은 '갈등'
옳고 그름 아닌 생존 위한 선택
[고양신문] 사람은 누구나 결정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오늘 점심은 뭘 먹지?”부터 시작해서,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물냉면이 좋을지 비빔냉면이 좋을지. 내가 스스로 선택하여 결정해야 하는 것도 있고 평소의 성향이나 내 안의 정의가 합쳐져서 자연스럽게 정치적 성향이 선택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자연적인 선택도 있습니다. 태어나는 지역이나 국가야 그렇다고 해도 성별이나 오른손잡이냐, 왼손잡이냐 하는 것은 완벽하게 선천적인 요소이니까요.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하는 것은 자연에서도 많이 나타나는 선천적인 선택입니다.
소라의 껍데기의 회전 방향이라거나, 덩굴식물의 꼬임 방향이 그렇습니다. 오른손잡이나 왼손잡이의 경우 인간이라면 양쪽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지만, 소라 같은 패각류의 껍데기나 덩굴식물의 꼬임은 하나의 종이라면 항상 같은 방향으로 꼬인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가령 칡은 오른쪽 감기를 하는 식물인데, 모든 칡은 전부 오른쪽 감기만을 하고 억지로 방향을 바꿔 놓아도 원래의 방향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칡은 과거부터 쓰임이 많았던 식물입니다. 줄기는 끈 대용으로 이용했고, 꽃은 벌이 꿀을 따거나 차로 마시며, 뿌리는 구황작물로서, 혹은 약으로서 유용하게 이용되어 왔습니다. 넓은 잎은 자연밥상을 차릴 때 접시 대용으로 이용해도 훌륭하지요. 하지만 칡은 자연계에서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존재입니다. 억센 줄기가 다른 식물을 감고 올라가서 성장을 방해해 죽일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칡의 입장에서야 자연계에서 번식을 하고 생존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선택이지만 말입니다.
같은 덩굴식물 중에도 칡의 이러한 꼬임이 달갑지 않은 녀석이 있습니다.
칡과 반대의 꼬임을 하는 녀석이죠. 칡이 오른쪽 감기를 한다면 등(등나무)은 왼쪽 감기를 하는 녀석입니다. 이 둘은 화합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새끼를 꼬거나 굵은 밧줄을 보면 꼬임 방향이 같은 쪽으로 되어 있어야 길게 꼬아 갈 수 있지만, 방향이 반대라면 둘을 꼬을 수 없으니까요. 꽃의 경우도 반대입니다. 같은 형태의 총상화서(꽃대 아래부터 위로 올라가며 꽃이 피는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칡은 하늘을 향해, 등은 땅을 향해 꽃을 피웁니다. 이런 칡과 등이 같은 생존 공간에 있다면 혼란 그 자체일 것입니다. 사람이 만나서 악수를 나눌 때에도 이쪽이 오른손을 내밀었는데, 상대방이 왼손을 내민다면 둘은 어색하게 손을 잡는 것처럼 말이죠. 갈(葛)인 칡과 등(藤)의 관계가 만들어낸 말이 바로 '갈등(葛藤)'입니다.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생존을 위해 올라가야하는 입장에서 함께 꼬일 수 없는 식물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불편한 일이죠. 화합되지 못하고 상대의 방향과 상관없이 자신의 방향으로만 꼬아 오르려하고 결국 강한 쪽이 남아 상대를 죽이게 될 것입니다.
생존을 위한 그 과정의 꼬임은 얼마나 큰 혼돈일까요?
가까운 관계인 같은 콩과 식물이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입니다. 인간의 세계도 자연 생태계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좌우의 이념 대립은 화합하지 못하고 꼬일대로 꼬인 칡과 등 같아 보이니 말입니다. 오른쪽으로 꼬아 올라가는 칡과 왼쪽으로 꼬아 올라가는 등, 어느 것이 옳은 판단일까요? 모든 덩굴식물이 같은 방향으로만 꼬아 올라갔으면 이러한 갈등은 없었을텐데 왜 같은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을까요?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치열한 경쟁을 거친 생태계 속에서 둘은 모두 살아남았다는 겁니다. 이 둘의 방향에는 옳고 그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화합할 수는 없어도 생존을 위한 다양한 선택인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선택 요소나 정치적 좌우 대립 역시 어느 쪽의 옳고 그름이 아닌, 자신의 정의와 양심을 지켜나간다면 다른 한쪽이 없어져야하는 존재는 아닐 겁니다. 내민 오른손을 왼손으로 잡고 악수를 할 수는 없어도, 함께 앞으로 걸어 나가기 위해서라면 오른손과 왼손의 잡음이 어색하지 않을테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