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현의 물 따라 가보는 고양
(2) 배수지
<건축학개론> 배우 배수지 보고
동네 산중턱 배수지 떠올려
수돗물 수급조절 완충 역할
지붕은 시민체육시설로 활용
[고양신문] 2012년에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러 갔다. 아련한 첫사랑의 감성을 불러일으킨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갔다. 출연 배우의 첫줄에 배수지라는 이름이 있었다. 수돗물을 공급하는 일을 하는 내게 너무나도 친숙한 이었다. 그 이름이 바로 그 영화로 국민첫사랑에 등극한 수지의 본명이라는 것을 나는 그날 알게 되었다. 이후로 출발 비디오여행 같은 영화 프로에서 <건축학개론>이 나올 때마다 나는 가수이자 배우인 수지와 함께 배수지를 떠올린다. 이건 뭐 직업병이다.
국민첫사랑을 미끼로 배수지 얘기를 꺼냈으나 글의 내용이 미스에이 수지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음을 먼저 이실직고한다. 다만, 수돗물 홍보대사를 추천할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면 수지를 적극 추천할 것이다. 수지가 이 제안을 좋아할지는 미지수다.
고양시에는 상수도사업소가 관리하는 총 19개의 배수지가 있다. 주로 동네 산중턱에 자리 잡은 배수지는 정수장에서 생산한 수돗물을 일시적으로 저장해두었다가 각 가정으로 보내주는 일을 한다. 정수장에서는 24시간 쉬지 않고 수돗물을 생산해서 보내는 반면에 각 가정이나 산업체에서는 아침과 저녁에 물을 많이 쓰고 한낮이나 심야에는 적게 쓰기 마련이다. 이러한 수요와 공급의 차이를 완충해주는 것이 바로 배수지이다. 만약 정수장에서 배수지를 거치지 않고 수도관을 직접 연결해서 공급한다면 큰 물공장인 정수장 시설을 수시로 껐다 켰다 해야 할 것이고 갑자기 물수요가 증가할 때 신속하게 충분한 양을 공급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또한 배수지는 수도 시설에 이상이 생겨 공급이 끊기더라도 담아 둔 물을 내려 보내줌으로써 시민들의 큰 불편을 초래할 단수를 막고 최소 몇 시간에서 반나절 동안은 시설을 복구할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첫 근무지 일산정수장에서 나는 수돗물의 수질검사와 수처리 공정관리 업무를 맡았다. 지금은 상수도사업소에서 맡아서 하지만 당시에는 우리 지사에서 한 달에 한 번 고양시 급수구역 내 배수지를 돌면서 수질검사를 했다. 배수지에 담긴 수돗물의 수질을 휴대용 측정기로 측정하는 일이었는데 탁도, pH가 기준 범위에 있는지, 소독제인 염소가 적정하게 들어 있는지 확인했다. 정발산 중턱에 있는, 고양시에서 가장 큰 5만톤 용량의 정발산 배수지부터 능곡, 화정, 중산, 화정 배수지 등 고양시 곳곳의 배수지들을 다녔다. 지금은 자동화되어 무인 시설로 운영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배수지 안에 가족과 함께 거주하면서 관리하시는 고양시 담당자가 계셨다. 무서운 개가 목줄이 풀려 있는 경우에는 들어가기가 겁나기도 했고 담당자인 남편분이 외출하시면 부인이 물을 틀어주시기도 했다. 지금도 정발산에 오를 때 배수지를 지나면 그때 배수지를 관리하시던 부부가 생각난다.
예전에 수도설비가 자동화되어 있지 않았을 때에는 정수장 안에도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근무했다. 지금은 중앙조정실에서 모든 시설을 원격으로 자동제어하지만 당시에는 각 설비가 있는 건물에서 일일이 수동으로 조작했기 때문이다. IT기술의 발달과 자동화로 사람들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수도시설의 경우만은 아니지만 배수지에도 사람이 없고 정수장에서도 사람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으니 사람냄새 나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배수지가 하는 일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완충이다. 완충, 들어오는 충격을 받아들여 줄여서 내보내는 일. 수돗물 공급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중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직장 생활을 예로 들자면, 대표나 임원부터 말단 사원까지 자신이 윗사람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자신의 안에서 완충하지 못하고 그대로 또는 심지어 증폭시켜서 아랫사람에게 내보낸다면 일터는 스트레스로 가득 차 곧 폭발할 것이다. 입력된 그대로 출력하지 않고 더 부드럽게 완충시켜서 내보내는 능력이야말로 모든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늙고 병든 부모와 뜻대로 안 되는 자식들 사이에 끼어 인간 배수지 같은 역할을 맡고 있는 중년들은 특히 자신 안의 완충용량을 키울 것을 요구받는다. 배수지의 정해진 완충용량은 바꿀 수가 없지만 사람의 완충용량은 수양을 통해 늘릴 수 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입력된 것을 바로 날것으로 내보내지 않고 안에서 조금 시간을 두고 숙성을 시키는 연습을 하면 가능하다.
배수지는 수질 관리에 중요한 시설이라 시민들의 출입이 통제되지만 배수지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잔디밭은 시민들에게 체육시설로 개방하고 있다. 정발산 배수지에는 파크 골프장이 있고 화정배수지 족구장, 신일산 배수지 인라인 하키장과 족구장, 고봉배수지 풋살장 등 대부분의 배수지 지붕을 시민들에게 개방 중이다. 개방된 체육시설은 고양도시관리공사 홈페이지(www.gys.or.kr)에서 이용신청이 가능하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배수지 위 체육시설을 이용해보시고, 배수지 부근을 지나시면 배수지가 하는 일, 완충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는 시간도 가져보시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