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곤의 손에 잡히는 책]
(3) 탄소민주주의
화석연료 석탄은 노동자 영향력 막강
20세기 초 서구민주주의 발전 기여
석유로 전환되며 자본, 기술 집중투여
금융자본주의 정치적 실체 떠올라
태양광, 풍력 등 대체에너지 중심되면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 등장할 것
[고양신문] 일전에 나는 이 칼럼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이 시대를 사는 모두가 읽어야 할 생태주의 교과서로 소개한 바 있다. 이 책을 통해 정말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지구는 우리 모두의 집'이며 '기후 변화가 우리 공동의 집을 위협하고 있다'는 생태적 경각심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주목할 내용은 기후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사회적 불평등에 있고, 기후 위기는 다시 그 결과로서 불평등을 심화한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의 회복이 기후 문제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 책으로 말하고 싶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참된 생태론적 접근은 언제나 사회적 접근임을 깨달아야 하며, 정의의 문제를 환경에 관한 논의와 결부시켜야 합니다”라는 말로 그의 가르침을 요약한 바 있다.
기후 문제를 생각하다보면 탄소 배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인 에너지 소비, 특히 화석연료 문제로 관심이 옮겨가기 마련이다. 화석연료에는 석탄, 천연가스 등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중에서 특히 석유는 전기, 플라스틱, 그리고 각종 산업물질의 형태로 현대 사회를 지탱해온 에너지원이자 소재이며, 지금의 기후 위기를 일으킨 주범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왜 민주주의와 관계있다는 건가?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란 인간 사회의 이야기이고 에너지와 기후는 자연의 문제라고 범주를 나누어 생각하곤 한다. 특히 석유 등의 화석연료는 민주주의 ‘바깥’에 존재하면서 그 물질적 조건으로서만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석유가 오늘날의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는 한 주체이자, 민주주의 ‘안’에서 그것을 지탱하거나 제약하는 요소라면? 단순히 기후 위기의 주범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적 삶을 좌우하는 숨은 통치자라면? 한마디로, 석유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면?
석유라는 화석연료가 기후 문제만큼이나 민주주의와 정치적 정의 문제에 맞닿아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책이 바로 티머시 미첼의 『탄소 민주주의』이다. 석유는 기후 위기를 경유하면서 더 중대한 이슈가 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현대 자본주의 경제를 이끄는 견인차로서 정치 영역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오일머니’나 ‘오일쇼크’라는 말에서 연상하듯이, 석유와 국제정치의 관계 또는 에너지 파동과 정치 변동 사이의 관계를 다룬 그간의 여러 책들과는 관심을 달리한다. 미국이 석유 지배권을 위해 중동 산유국의 독재 정치를 어떻게 지원했는지, 유럽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송유관을 둘러싸고 어떻게 갈등을 빚어왔는지 등 석유의 생산과 분배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나 국제적 역학관계를 다루는 책이 아니라는 얘기다.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이 “탄소 연료와 특정한 종류의 민주적 또는 비민주적 정치 체제 사이에 만들어진 일련의 연결점을 추적하여, 석유와 민주 정치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화석연료가 어떻게 ‘특정’ 정치 체제와 연결되는지는 석탄과 석유의 차이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석탄은 소자본으로도 탐사와 개발이 가능하고, 채굴과 운송과 가공 과정에서 인간 노동력이 대거 투입되어야 한다. 탄광에서 캐낸 석탄이 철도, 운하, 항만을 통해 도시와 공장으로 대량 운송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여기서 『탄소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이 석탄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쥘 수 있었다는 데 주목한다. 자본가의 눈은 땅속 깊이까지 미치지 못해서 독립적 공간에서의 노동자 작업이 가능했고, 땅 위에 올라온 석탄은 다시 철도 및 항만 노동자의 통제에 놓일 수 있었다. 덕분에 석탄의 ‘흐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노동자들은 ‘동전 하나’만 끼워 넣어도 이 흐름을 멈출 수 있었고, 자본에 대한 강력한 교섭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은 그 힘으로 중앙 정치에서 투표권 쟁취와 복지제도 도입 등 20세기 초반의 서구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화석연료의 중심이 석유로 바뀌면서 정치적 가능성도 크게 변모한다.
석탄이 노동집약적 에너지라면 석유는 자본-기술집약적 에너지라 할 수 있다. 땅속 깊은 곳까지 탐사 시추할 수 있는 전문지식, 대규모 유전 개발, 그리고 원격 이동을 위한 송유관 건설, 정유 시설 등 석유를 채굴-운송-정제하는 데는 자본, 기술의 집중적 투여가 필요하며, 인간 노동력은 상대적으로 큰 몫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석탄의 생산과 소비가 한 나라 내에서 완결된다면, 석유의 경우에는 중동 등의 산유국과 수입국가의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산유국의 내부 정치는 수입국의 정치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화석에너지의 중심이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되면서 에너지 흐름에서 차지하는 노동의 역할이 크게 약화되었고 노동계급의 정치적 힘도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노동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다국적 석유회사, 그들에게 자본을 대는 금융기업, 전문기술자 및 관리자였고, 정치적 결정권은 이들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금융자본주의’라는 말이 명실상부한 실체를 갖추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그런 점에서 1980년대 초 신자유주의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는 영국 대처 총리의 탄광파업 분쇄 작전은 상징적이다.
이 책 『탄소 민주주의』에서 가장 어려운 내용이자 중요한 지점이 ‘경제학’을 다룬 부분이다. 경제는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정치적 행위의 보조수단이거나 자원 배분을 위한 도구였지, 지금처럼 정치 자체를 좌우하는 핵심적 영역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금본위제에서 풀려나서 추상적 가치의 무제한적 창출이 가능해진 화폐 경제는, “석유라는 무한정의 자원을 통해 더욱 탈물질화되고 탈자연화된 정치 형태를 가능케 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석유는 그 속성상 매장량을 추정하기가 매우 어렵고, 또한 셰일가스와 샌드오일의 사례처럼 기술 발전 여하에 따라 추정 채굴량을 고무줄처럼 늘리고 줄일 수 있는 자원이다. 이러한 불확실성과 무제한적 확장성에 힘입어 화폐는 자연이라는 ‘지하’의 속박에서 풀려나와 오로지 ‘지상’에서의 교환과 유통만을 대리하는 수단이 되었고, 경제는 이 지상과 지하 사이의 갭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왔다고 한다. 무제한의 가치 창출과 성장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미신이 가능하게 되었고 정치적 실체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석유 의존 사회의 폐해가 부각되고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는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기후 변화와 생태적 위기는 석유에 비해 일찍부터 민주적 협상 테이블의 의제로 올라와 있고, 유권자와 다수 민중의 관심에 의해 정치적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석유 역시 탄소 배출과 고갈로 인해 더 이상 유권자들의 정치적 시선에서 비껴갈 수 없게 됐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에 내포된 가정에 대해 근본적 의문을 제기한다. 민주주의는 서구 자유민주주의처럼 어떤 원본의 동일한 형태를 가진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새로운 정치 주체의 생산, 새로운 통치 방식에 사람들을 종속시키는 엔지니어링”에 가깝다는 것이다. 석탄과 석유가 그러했듯이, 태양광, 풍력 등 대체 에너지가 미래 에너지의 중심이 되면 또 그에 맞는 형태와 구조를 가진 민주주의가 등장할 것이다.
이 책을 소개하며 나는 마지막으로 ‘에너지’라는 것이 인간 삶에서 차지하는 근본적 의미를 묻고 싶다. 이반 일리치는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원제 『에너지와 공정성』)에서 현대인의 가장 큰 문제는 석유, 석탄을 택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중독’과 ‘과식증’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어떤 형태의 에너지든 그것이 끊임없이 공급되는 한 우리는 그것을 이용하기 위해 끝없는 기계, 전자제품, 자동차를 요구할 것이고, 이를 통해 자연은 또다시 낭비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태양광 발전 등을 에너지 전환의 출구라며 환영해야 할까? 물론 화석에너지가 초래한 폐해를 생각하면 당장의 해법으로 그것을 마다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에너지 의존 사회에서 벗어나서 상호 절제와 협력이라는 민주적 질서를 회복하지 않는 한, 어떤 에너지로도 끝없는 자연 착취와 성장의 불평등 구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