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가파도 편지 18
[고양신문] 몽테뉴의 『에세』를 읽고 있습니다. 몽테뉴는 그 책에서 “나는 무엇을 아는가”를 묻습니다. 그의 대담하고 솔직한 자기탐구와 세계관찰의 기록들이 놀랍습니다. 읽다가 문득 나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게 되었습니다. 이 나이에? 뭘 몰라서? 그래요. 뜬금없지요. 그래도 갑자기 이 질문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물려받은 유전자를 유지하고 번식하는 생존 기계일까요? 아니면 우리 종의 이름대로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아니면 과거의 삶이 축적되어 남아 있는 흔적이 나일까요? 아니면 오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 모습이 나일까요? 아니면 내가 꾸는 꿈이 나일까요? 생각이 나일까요? 기억이 나일까요? 앎이 나일까요? 내가 맺는 관계가 나일까요?
태어날 때부터 다녔던 교회가 말하는 대로 하느님의 자식일까요? 불교가 말하는 대로 나란 없는 걸까요? 마치 집을 짓듯이 나는 높이 쌓이는 걸까요? 아니면 빙산이 무너지듯이 낮게 가라앉는 걸까요?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듯 시공간에 잠시 머무는 입자들의 집합일까요?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것과 죽는 것의 차이는 없는 것 아닐까요?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바보들의 이야기야. 함성과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지”라고 말해야 할까요?
삶을 더듬으면 나를 알 수 있을까요? 초중고를 겨우 졸업하고, 대학에 엉겁결에 입학하고, 간신히 대학을 졸업하고, 교회를 다니고, 연애를 하고, 교회에서 개혁운동을 하다가 쫓겨나고, 동네에 지역청년회를 만들고, 전국 조직과 결합하고, 지역선거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고, 거리에 나서 최루탄을 마시며 싸우고, 광주로 내려가 전남대학교 찬 교실에서 신문지를 덮고 하룻밤을 보내고, 명동성당에서 시위를 하고, 청년단체의 간부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감옥에 가고, 출소하여 학원에서 국어와 논술을 가르치고, 인터넷 방송에서 논술을 강의하고, 그만두고, 고양시로 이사 와서 다시 교회를 다니고, 청소년도서관을 만들고, 책을 쓰고, 전국을 다니며 강의를 하고, 인문학 단체를 결성하고, 철학을 강의하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그간 쌓아왔던 거의 모든 것들을 잃고, 친구 집에 작업실을 만들고, 가파도로 내려와 매표원이 되고, 그래도 글이라는 걸 계속 쓰고, 책을 출간하고,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고…….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선생이자, 작가이자, 매표원인 사람? 그게 날까요? 이름이 날까요? 지위가 날까요? 생각이 날까요? 행위가 날까요? 관계가 날까요? 이 답 없는 질문을 계속 던지며 이 무더위를 견디고 있습니다. 전국이 장마라는데, 가파도에는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대신 안개가 끼고, 공기가 습하고, 지열은 오르고, 바람은 미지근합니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흐르고, 잠을 자도 땀에 젖어 자주 깹니다. 몸이 끈적끈적하니 생각도 끈적끈적해지는 것 같습니다.
살다 보면 그동안 명료했던 것들이 희미해지고, 분명했던 것들이 불투명해집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을 철학적으로는 성찰이라 하고, 과학에서는 메타 인지라고 합니다. 자신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 밖으로 의식을 끄집어내어 자신을 관찰하는 이 능력은 사피엔스라고 부르는 종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네요. 그게 능력인지 아니면 진화적 실수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내 피서 방법이긴 합니다.
아마도 그동안 친숙했던 삶의 거처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홀로 지내는 삶이 나를 돌아보게 하고, 평소에는 던지지 않았던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몽테뉴같이 용감하게 “나는 무엇을 아는가”를 묻지 못하고, 소심하게 “나는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냅니다. 건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