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보다 오래된』 (문선희 지음, 가망서사)
10년간 찍은 고라니 사진 50여 점 묶어
『숲의 끝에서』 (지성희 글, 고정순 그림, 반달)
인간과 살아가는 고라니의 고단한 삶
한창 새벽까지 일을 즐기던 때이다. 도서관에서 새벽까지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공릉천 주변에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지만, 10년 넘게 다니던 길, 1차선 도로를 쭉 따라가면 집이 나오는 터라 편안한 마음으로 운전하고 있었다. ‘끼익-’ 나도 모르게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안개 사이로 무언가가 뛰어들었다. 고라니였다. 순간 안개가 살짝 걷히면서 고라니와 눈이 마주친 듯했다. 그것도 찰나. 고라니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던 피가 머리로 몰린 듯했다.
‘아니, 이렇게 안개 낀 날 불빛을 보고 그냥 뛰어드는 녀석이 어디 있어!’ ‘만약 뒤에 따라오는 차라도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아니, 내가 브레이크를 조금이라도 늦게 밟았으면….’
화가 났다. ‘죽으려고 환장한 고라니 녀석.’ 그리고 그 일은 어느 술자리에서 ‘죽으려고 환장한 고라니’로 가끔 등장하곤 했다.
『이름보다 오래된』(문선희 지음, 가망서사). 이 책은 문선희 작가의 사진집이다. 무려 10년간 찍은 고라니 얼굴 50여 점과 관련 기록을 묶었다. 고라니가 작가와 눈을 맞출 때까지 오래 기다려 찍은 얼굴들이 책 한 장 한 장을 채우고 있다. 그랬다. 고라니도 얼굴이 있었다. 인간이 지은 이름일 ‘고라니’에게도 각각 다른 얼굴이 존재했다. 누구는 눈이 크고, 누구는 코가 작고, 누구는 입꼬리가 올라가 있고, 누구는 미간이 좁거나 넓었다. 다 다르게 생겼다.
순간, 안개 속에서 본 고라니 얼굴이 떠올랐다. 그도 나를 봤을까? 내가 봤던 고라니는 깜짝 놀란 눈빛이었는데, 나는 어땠을까? 공포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보고 있었을까? 그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죽으려고 환장한’이라 부른 나를 ‘죽이려고 환장한’으로 여기진 않았을까?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고라니는 환경부 추정으로 약 70만 마리. 그 가운데, 2023년 한 해 신고된 로드킬은 총 7만9278건이었고, 종별로 보면 고라니가 1만8267건으로 최다였다(미신고 건까지 고려하면 더 많을 수 있다). 포획과 로드킬 뿐 아니라, 인간의 개발로 인해 서식지가 상실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출처: 환경부·국립생태원 자료)
그림책 『숲의 끝에서』(지성희 글, 고정순 그림, 반달)에 나오는 고라니도 그랬다. 키가 큰 나무들이 사라졌다. 키 작은 나무도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진 숲을 떠나 새로운 숲을 찾아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고라니의 자리는 구석에서 구석으로, 끝에서 끝으로 자꾸 줄어들었다. 낯선 나무 냄새에 눈을 뜬 고라니는 드디어 새로운 숲을 만난다. 이곳에서 고라니는 예전처럼 뛰어놀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 흐릿해진 몸통 사이로 고라니가 뒤돌아본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때, 안개 속에서 만난 그 고라니인가? 언뜻 눈빛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이려고 환장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공포와 원망, 그리고 무언가가 더 섞인 눈빛.
그 고라니는 지금까지 살아 있을까? 고라니의 평균 수명은 12년 남짓이다. 하지만 인간과 얽혀 살면서 그 평균 수명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어떻게든 로드킬도 피하고, 포획도 피하고, 서식지 상실도 피했을 수 있지만, ‘죽이려고 환장한’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단할지 가늠되지 않는다.
이제 더이상 그때 그 고라니를 ‘죽으려고 환장한’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도 예쁜 눈을 가졌고, 늘씬한 팔다리를 가졌고, 까맣고 따뜻한 코를 가진 생명이었을 테니. ‘고라니’로 통칭되지만, 저마다의 얼굴과 이름을 가졌을 테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