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풀꽃이야기]
사람과 숲 먹여살린 참나무 열매
여섯 종류 구분 '알쏭달쏭' 재미
[고양신문] 힘겨웠던 여름이 언제 끝나나 싶었는데, 한층 바람이 시원해진 느낌입니다. 기다리든, 기다리지 않든 계절은 변해갑니다. 가을이 다가오면서 숲은 풍요로움을 준비 중입니다. 매서운 겨울을 준비하기 전에 결실을 맺어야합니다. 이미 많은 종의 식물이 종자를 만들어 냈지만, 아직 숲의 결실은 조금 이릅니다. 도토리는 이제 막 영글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우리나라 식물 중 '도토리나무'라 불리는 나무는 있어도 도토리나무는 없습니다.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는 있지만, 식물 이름 중에는 도토리나무는 없다는 뜻입니다. 참나무 계열의 나무에서 도토리가 열리는데, 참나무라는 이름을 갖는 나무가 없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들이 참나무과에 속해 있을 뿐이죠.
서양에서 말하는 오크(Oak)가 이 참나무를 말합니다. 참이 들어간 생물은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참이란 '진짜'를 말하는 것으로 으뜸이거나 대표적인 것에 접두사로 붙는 말입니다. 참나무들은 쓰임새가 많은 나무이죠. 과거에 땔감이나 농기구를 만들 때 굉장히 유용한 식물이었으며, 열매인 도토리는 먹을 것이 부족하여 어려운 시기에 사람과 숲을 먹여 살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흔히 얘기하는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는 다양합니다. 신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를 비롯하여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 그리고 남쪽에서 상록으로 자라는 가시나무 종류나 구실잣밤나무 등이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입니다. 이 외에도 물참나무나 갈졸참나무 등 다양한 도토리나무가 있으나, 흔히 이야기하는 도토리나무는 처음의 여섯 종류입니다. 잎이 크고 뒷면에 털이 많아서 떡을 감싸기 좋은 떡갈나무, 짚신 밑창에 깔기 좋게 잎자루가 없는 신갈나무, 잎과 도토리가 작아 졸병인 졸참나무와 가을 참나무인 갈참나무는 잎 뒷면 색이 옅어 바람 부는 날 숲의 색을 바꾸죠. 밤나무와 비슷하게 잎이 좁고 긴 상수리나무와 굵은 도토리가 열려 이름 붙은 굴참나무도 대표적 도토리나무입니다. 간혹 상수리나무 이름 유래에 대해서 임금께서 피난하실 때 수라상에 올라 이름이 붙었다는 설명을 듣기도 하는데, 이는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상수리나무는 '상실'이 열리는 나무를 뜻하는 말이고, 상실은 도토리를 의미합니다. 다만 상수리와 굴참나무는 다른 종류의 도토리나무와 잎의 형태도 다르고 도토리도 비교적 크고 굵은 편이죠. 요즘은 크게 구분 짓지는 않습니다만, 연세가 많은 노인들은 갈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의 열매는 도토리라 부르고,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의 열매는 상수리라하여 도토리 가루를 만들 때 두 종류의 열매를 분리하기도 합니다.
굴참나무는 굵은 도토리가 열려 이름이 유래됐다는 설과 골이 진 코르크가 잘 발달한 수피를 이용해 굴피집을 지어 이름이 유래됐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갈참나무는 가을참나무라고 보는 견해와 갈나무와 참나무의 합성어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후자라면 갈나무도 참나무고 참나무도 참나무이니 재밌는 이름인 것 같습니다. 신갈나무의 경우 굳이 신에 깔창으로 썼다기보다 신발 밑창을 닮은, 그 정도로 큰 잎을 가졌다는 의미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졸참나무는 잎도 다른 도토리나무에 비해 작은 편이지만 열매도 제일 작아 왜소하다는 의미로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위에서 거론했던 가시나무나 구실잣밤나무의 열매도 도토리묵을 만드는 가루로 쓰인다고 합니다. 밤으로도 묵을 만들 수 있으니 나름 도토리인 가시(가시나무의 열매)로 묵을 못 만들 이유는 없겠죠.
땔감이 귀했던 시절, 과연 숲에서 얼마나 많은 도토리나무가 있어서 사람을 먹여 살렸을까요? 조선말기 오래된 사진을 살펴보더라도 아주 큰 산을 제외하면 거의 나무가 남아있지 않았으니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산에서는 귀했던 도토리나무지만, 구황작물로 이용하기 위해 마을 근처로 내려와 사는 상수리나무는 남겨뒀던 것입니다. 여전히 상수리나무는 깊은 산보다 사람 가까이에 사는 나무입니다.
도토리나무는 무수히 많은 도토리를 만들지만 그 중 실제로 싹을 틔우는 도토리는 극히 일부분입니다. 도토리나무는 아주 작은 확률을 염두해두고 많은 양의 열매를 만들어 숲의 동물을 먹여 살려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도토리를 먹는 작은 친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바로 다람쥐의 이야기입니다. 상수리나무 어원의 오해처럼 이 작은 친구도 많은 오해를 받는 듯합니다. 가을철에 볼 주머니가 터질 듯 많은 도토리를 모아 여기저기 묻어두는 다람쥐는 머리가 나빠서 그 도토리를 다 캐먹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럴리가요. 아직까지 묻어둔 도토리를 찾지 못해서 굶어 죽은 다람쥐의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 부지런한 친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저축하고, 딱 필요한 만큼만 찾아 먹을 뿐입니다. 그리고 남겨둔, 다람쥐에게 필요 이상인 도토리는 그대로 땅 속에 남아 싹을 틔우고 숲을 만들겠죠. 그리고 그 숲은 자라 다시금 많은 생명을 키우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