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현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연구위원장
백장현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연구위원장

[고양신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9월 22일 장문의 연설을 했다. 한국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상대로 한 이 연설은 북한 주민들의 필독 매체인 <로동신문>에 전문이 게재되었는데, 특이하게도 절반 가까이가 대남·대미 관련 내용이다. 왜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 주민들에게 인기도 없고 생소한 대외 문제에 대해 이렇게 긴 시간을 할애한 걸까? 더욱이 올해는 해방 80주년, 로동당 창건 80주년이자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의 마지막 해이기에 할 얘기가 많았을 텐데 말이다. 

‘비핵화 절대 불가’와 ‘적대적 두 국가론’

김정은 위원장은 대외 문제 중에서도 두 가지에 대해 집중했다. 첫째, 비핵화를 절대 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 이유로 핵무기 개발은 “국가의 생존이냐 사멸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취한 필수불가결의 선택”이었고, 핵보유를 헌법과 ‘핵무력정책에 관한 기본법’에 명기했기 때문에 비핵화는 불가하다는 것이다. 비핵화를 하면 위헌인데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강변한다. 따라서 경제제재 해제를 위해 비핵화와 맞바꾸는 협상 따위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미국이 “핵을 포기시키고 무장 해제시킨 다음 무슨 일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세상이 이미 잘 알고” 있기에 북한은 “절대 핵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2011년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이 경제제재 해제를 위해 비핵화를 한 후 미국에 의해 살해된 것을 지적한 것이다.  

한편 김정은은 미국과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입장도 밝히고 있다. 단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털어 버리고 현실을 인정한데 기초하여 우리와의 진정한 평화 공존을 바란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 있다.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하고 평화 공존을 원한다면 북한도 “미국과 마주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아직도 개인적으로는 현 미국대통령 트럼프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며, 트럼프에게 구애의 손짓을 하고 있다. 

둘째, 김정은은 자신의 ‘적대적 두 국가론’이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서 “하나가 없어지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는” 통일은 결단코 불필요하다고 강변했다. 북한과 한국은 “지난 몇십 년 동안 국제사회에서 사실상 두 개 국가로 존재해왔으며, 지구상 가장 적대적인 두 국가, 전쟁중에 있는 두 교전국이 첨예하게 대치해 온 것이 엄연한 현실”이란 것이다. 자신이 “한국을 타국으로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규정한 게 오늘 갑작스레 내린 판단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인 것 뿐”이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남북이 적대국가가 된 것은 이승만 정부의 단독정부 수립, 한국 헌법의 영토조항, 남북의 유엔 동시 가입, 한미 연합군사훈련, 반북 의식이 반영된 국가보안법 때문이라며 그 책임을 한국에게 돌리고 있다.  

남북은 “철저히 이질화되었을 뿐 아니라 완전히 상극인 두 실체의 통일이란 하나가 없어지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기에 “결단코 통일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모든 분야가 미국화된 반신불수의 기형체, 식민지 속국이며 철저히 이질화된 타국이기에 북한의 사회주의 문화와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과 마주 앉을 일이 없으며 그 무엇도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며, 한국과 일체 상대하지 않겠다고 한다. 주목할 점은 “이재명 정부가 관계 개선, 평화, 융화노선을 제창하고 있지만 본질상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흡수통일 야망에 있어서는 이전의 악질 보수 정권들을 무색케 한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을 “이전 정권과의 차별화를 위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 내용이다. 

해법 어려운 체제 안정과 경제 회생

왜 김 위원장은 해방 80주년, 조선로동당 창건 80주년을 맞아 주민들에게 희망을 제시하기는커녕 이토록 인기 없는 얘기를 길게 한 걸까? 그간 북한 당국은 정치적 정통성과 주민 단결을 위해 통일 담론을 구사해왔다. 미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남한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며 통일 투쟁을 해야 한다는 담론은 수십 년간 북한 주민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당위였다. 그런데 갑자기 남북이 이질화되었기에 통일이 불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논리가 쉽게 먹힐 리 없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민족은 70여 년 갈라져 살았다고 해도 공통점이 이질점 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쯤은 북한 주민들도 본능적으로 안다. 

비핵화 불가 논리도 그렇다. 경제 형편이 나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주민들의 입장에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그간 북한 당국이 모든 경제적 어려움은 다 미국의 경제 제재 때문이라고 설명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핵보유가 신성불가침이기에 경제 제재 따위와는 거래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럼 경제 제재 해결은 물 건너간 것인가? 핵무기 보유는 체제 유지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경제 회생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지 않은가?

김정은의 연설이 길어진 것은 북한 주민들에게 먹히기 어려운 논리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이후 북한 당국은 새로운 고민을 안게 되었다. 남북관계 호전과 남북 교류협력 증가는 경제난 타개에는 도움이 되지만 북한 체제를 위협하기 때문이었다. 북한체제의 안정에 필요한 핵무기 보유와 남북 간 적대적 대치는 경제 회생에 필요한 서구로부터의 대규모 외자 유치 정책과 상충된다. 경제 회생에 중국, 러시아로부터 들여오는 자원만으로는 언 발에 오줌 누기다.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새로운 대북 정책으로 ‘END 이니셔티브’를 제시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E(exchange, 교류), N(normalization, 관계정상화), D(denuclearization, 비핵화)의 관계에 대해 우선순위와 상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며, “남북 대화와 북미 대화를 통해 교류, 관계 정상화, 비핵화의 과정이 서로서로 상호 추동하는 구조”로 추진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정책 성공을 위해서는 우선 순위가 중요하다. 비핵화는 관계정상화와 교류가 진행되며 해결될 사안이다. 협상은 상대방이 있기에 협상 성공을 위해서는 상대의 처지와 고민을 헤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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