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이준익 감독 영화 <황산벌>(2003년)에는 곱씹어 볼 만한 대사가 많이 나온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같은 대사가 그렇다. 영화에서는 계백 장군과 그 아내 사이의 언쟁도 볼 만하다.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죽을 각오로 황산벌 전투에 나서는 계백이 먼저 그 아내와 자식을 죽이려고 하는 장면에서이다. 계백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그 이름을 남긴다”는 말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하자 부인이 이렇게 맞받아친다.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는 것이고, 사람은 그 이름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참 그깟 이름이 뭐라고….
그런데 사실 그 이름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또한 사람이다.
“인간은 마지막까지 이름으로 존재한다. 누구나 이름으로 기억되고 끝내 이름 하나를 남긴다.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아야 하는 수도승들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것이 자신의 이름이다.” (김택근, 『묵언』)
물론 악취가 진동하는 이름들도 있다. 이완용, 박제순 등 을사오적의 이름이나 안두희, 이근안, 김창룡 등 역사의 한 모퉁이에 땟자국처럼 늘어붙은 이름들도 있다.
사람은 자기 이름에 구속되기도 한다. 나도 내 이름자에 들어있는 범(範)자를 은연중 의식하고 산다. 어릴 때 몇 번 받았던 ‘우등상’에는 대개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위 사람은 품행이 방정하고 타의 모범이 되었기에” 운운하는. 어려서부터 ‘타의 모범’이 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노력해 왔던 것일까?
세속적 부귀영화와 이름값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다. 10대의 꽃다운 나이로 조국을 위해 산화한 유관순 열사(1902~1920)나, 향년 30세로 세상을 떠난 안중근 의사의 이름값은 살아서 온갖 부귀영화와 천수를 누린 이완용(1858~1926)이나 권중현(1854~1934) 같은 매국노들의 이름값에 비할 수 없이 높고 고귀하다. 22살 나이로 노동조건 개선을 외치며 스스로를 불살랐던 전태일의 삶이 90세 나이로 죽을 때까지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하지 못했던 전두환의 비루한 삶과 비교될 수 없다. 39살 나이로 볼리비아 밀림에서 싸우다 죽은 체 게바라는 살아서 쿠바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피델 카스트로(1926~2016) 보다 더 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살아있다.
명절을 지나며 보니 거리 곳곳에 어지러이 붙어있는 현수막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러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과 이름을 내놓고 추석인사를 건네고 있다. 아는 얼굴, 이름도 있지만 모르는 이름들도 많다. 저 사람들이 왜 새삼스럽게 나에게 인사를 할까? 생각해 보니 내년에 지방선거가 있다. 명절인사를 빙자한 이름 알리기인 것이다.
결국 저 이름들 중에 누군가가 내년 선거에서 당선이 되어 시장이 되고, 도의원이 되고 시의원이 되는 것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시 내가 요새 관심 갖고 있는 산황산 문제를 되돌아보게 된다. 저기 걸려있는 이름들이 내년 선거에 나와 민심을 받들겠다고 한 표를 호소할 것이다. 그들 중 보다 많은 표를 얻은 사람들이 당선돼 행정 권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 그 권력은 주민들을 위해서 행사될 것인가? 시민들의 허파 노릇을 하는 멀쩡한 산황산을 파헤쳐 골프장을 짓는 것. 그것이 더 ‘공익’에 부합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이동환 시장도 선거에서는 결국 ‘민심을 대변하겠다’고 또 한 표를 호소할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을 바꿔서 해 볼 수도 있겠다. 정말 골프장을 건설하는 것이 산황산을 보존하는 것보다 공익적 가치가 더 클 것이라고 시장이나 관련 공무원들이 확신하고 있다고 믿어보자. 개발업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시민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어보자. 그렇다면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제안 하나 하고자 한다. 골프장 입구에 이동환 시장과, 골프장 허가 결재선상에 있던 모든 공무원들의 이름을 새긴 ‘공덕비’, 아니 ‘공로비’ 하나를 반드시 세우기 바란다. 그래서 거기에 새겨진 이름들이 자자대대손손 어떤 이름으로 평가받게 될지 한번 놔둬 보는 것은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