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고양신문] 50대 후반의 큰딸. 90을 바라보는 부모님은 두 분이 살고 계시고 나는 자동차로 3시간 거리에 살고 있다. 부모님 댁 근처에 사는 여동생과 오빠가 부모님 댁에 자주 찾아뵙고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여동생과 오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지만 멀리 떨어져 살다보니 마음만 있지 큰 도움이 못 된다. 부모님은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부지런하신 어머니가 살림을 하시고, 여동생이 택배로 필요물품을 배달시켜주어 장보기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어머님이 도움 요청하시는 일을 도와드린다. 가끔씩 병원에 가시려면 오빠가 자동차로 출동해서 다니는 상황이다. 지난달 아버님의 거동이 조금씩 둔해져 거의 누워지내신다고 해서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 집 안에서라도 걷고 움직여야 돼요. 집옆의 놀이터에 나가서 바깥바람 쐬세요”라는 잔소리를 했다.
아버지의 움직임이 줄어들수록 어머니의 목소리에 기운이 빠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부모님을 모시고 외식이라도 하려면 아버지는 안 나가고 싶어 하신다. 지난 추석에 집 근처 식당으로 같이 나갔는데 몇 걸음 못 걷고 쉬기를 반복해서 ‘이제 아버지 모시고 외식을 자주하기는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노인복지관련 일을 하는 지인과 통화를 했다. 아버지의 건강에 대해 얘기하던 중 아버지가 장기요양등급을 받을 수 있겠고, 방문요양서비스를 받아서 어머니의 가사부담을 덜어드리고 아버지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 ‘공학박사면 뭐 하겠어? 힘든 두 분에게 도움되는 정부정책을 모르고 지냈구나.’
부모님의 건강이 안 좋아지시고 자녀들이 도와드리는 일이 늘어나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나의 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우리는 삼남매가 각자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괜찮을 거야’라는 일말의 안도에 그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초고령사회니 기대수명 100세시대니 하는 뉴스는 남의 얘기로만 생각하고 ‘두 분이 지내시다가 집에서 살기 어려워지면 요양원에 가시게 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걱정만 하고 있었다. 내 자녀의 진학이나 학원보내기나 건강문제, 친구문제 등 모든 것을 직접 관여하고 나의 일로 받아들였던 것과 달리 나의 늙은 부모님은 국가의 돌봄도 몰라서 못 받고 계시도록 방치한 건 아닌가, 라는 생각에 미치자 양심의 가책이 밀려온다. 나만 그럴까?
내 주변의 지인들과 부모님 얘기를 해보면 본인이 처한 상황과 부모님의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분도 있고, 부모님과 가까이 살며 자주 만나 필요한 도움을 드리고 사는 분도 있지만 나처럼 다른 형제들이 적당히 도움드리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하고 생각하는 분이 더 많은 것 같다. 우리 세대는 자녀를 잘 키워야 한다는 것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교육받았지만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한다는 것은 교육받은 바가 없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다면, 건강도 안 좋고, 컴퓨터도 잘 못하시는 부모님을 중년의 우리가 국가와 사회의 도움을 받아 돌봐드려야 한다. 이제 부모님을 도와드려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