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스페이스 애니꼴, 정규석 초대전 ‘WILDFLOWER'

 

정규석 작가의 'WILDFLOWER' 시리즈 중 한 작품. 바탕에 그려진 나뭇결이 무척 사실적이다.

 

하이퍼리얼리즘과 전통적 소재의 조화

[고양신문] 전시장에 들어서는 관람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첫 번째로 만나는 작품 앞에서 작품 가까이로 다가가 눈을 바짝 들이대곤 한다. 그림이 그려진 바탕이 일반적인 캔버스가 아니라 나무로 만든 문짝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일부 관객들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판단이 서질 않는지 얼떨결에 손끝으로 작품 한구석을 살짝 만져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제서야 나무판이 아니라 일반 캔버스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다.

그림의 바탕은 관람객을 깜짝 속일 만큼 정교하다. 나이테 무늬며 갈라진 결, 군데군데 박힌 옹이자국까지 실제 나무판과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그 위에 아름다운 꽃무더기가 피어 있고 노랑 나비도 한 마리 찾아와 앉았다. 햇살 좋은 봄날의 언덕을 걸으며 들꽃을 만나는 기분이 이럴까. 마음까지 화사해진다.

 

전시를 여는 정규석 작가는 팝아트, 하이퍼리얼리즘과 같은 서구적 기법과 우리의 전통 미의식을 조화시킨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올록볼록 나뭇결 위에 꽃과 나비 표현

순수미술 전시 공간 ‘아트스페이스 애니꼴’에서 독자적인 화풍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정규석 작가(숭의여대 교수)의 초대전 ‘WILDFLOWER’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된 그림들은 원초적인 미적 쾌감을 전달하면서도 들여다보면 볼수록 신비롭고 흥미롭다. 비밀은 그림을 구성하는 3차원의 ‘기법상의 중첩’ 때문인 듯. 그림의 바탕은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나무판이다. 그 위에 단순하면서도 경쾌하게 디자인된 꽃의 이미지가 펼쳐지고, 또 그 위에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나비가 올라간다. 서로를 배반할 것만 같은 기법상의 중첩은 놀랍게도 서로의 매력을 더욱 부각시키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자연스레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미적으로 구성된 독창적인 공간으로 관람자의 감성을 초대한다.

정규석 작가는 70~80년대 팝아트와 하이퍼리얼리즘 기법을 다양하게 시도하며 미술 공부를 한 극사실주의 1세대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이다. 이후 그는 민화, 목조건축과 같은 전통의 이미지로 관심을 확장해 서구적 경향과 전통적 미의식을 함께 담아내는 새로운 시도들을 꾸준히 펼치며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오고 있다. 전시를 통해 선보인 ‘WILDFLOWER’ 연작의 중심 테마인 들꽃 이미지만 하더라도 팝아트적 심플함과 민화적 구성이 공존한다. 그런가하면 극사실적으로 그려진 나무 무늬는 고궁이나 고택의 퇴락한 나무 문짝을, 화면으로 날아든 나비는 장자의 ‘나비 꿈’ 이야기를 연상케 하는 등 지극히 동양적인 편안함과 익숙함을 담고 있다.

작품은 특정한 꽃이름을 굳이 찾아 붙일 필요를 못 느낄 만큼 다양한 이미지들이 섞여있다.
“이름 모를 들꽃들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형적으로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그런 다양한 꽃들의 세계를 한 화면 안에 자유분방하게 담아내려 했습니다. 현실의 소재를 원하는 형태로 새롭게 디자인하는 자유는 작가가 누리는 특권이지요.”

은은한 파스텔톤의 색감 역시 독특하다.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파스텔톤은 서구적인 색감 같지만, 사실 우리 전통미술에서도 ‘초충도’를 비롯해 파스텔톤의 색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오래된 목조 건축의 퇴락한 단청색 등의 느낌도 파스텔톤에 가깝구요. 시간의 흔적을 담아낸 색감이라고나 할까요.”
작가의 말대로 전시된 작품들의 색감은 무척이나 부드러우면서도 매우 정갈한 ‘깊이’를 품는다. 

 

정규석 작가의 그림은 사실성과 인공성이 3단계로 중첩된 화면을 보여준다.

 

다양한 미적 기법 한 화면에 담아내

‘WILDFLOWER’ 연작 시리즈는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60대 중반인 지금의 내 나이가 작가로서 자기만의 세계를 완성하고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대개의 예술가들이 그렇듯, 정규석 작가 역시 패기만만한 젊은 시절에는 그림을 통해 이것저것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는 욕구가 강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연스럽게 버릴 걸 버리고 필요한 것들만 남기게 되었다. 그 과정을 통해 비로소 어느 누구와도 다른 정규석 작가만의 개성 있는 예술 세계의 윤곽이 그려진 것.

고마운 건 그 세계가 일반 대중들에게도 무척이나 친절한 표정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림을 보고 나면 마음속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앉은 듯 은은한 설렘이 고인다. 팝아트와 하이퍼리얼리즘과 전통미술의 세계를 두루 여행하고 돌아온 대가가 고양의 관객들을 위해 건네는 따뜻한 봄 선물이라고나 할까.  
       
정규석 초대전 ‘WILDFLOWER'

기간 : ~ 6월 5일(월)
장소 : 아트스페이스 애니꼴(일산동구 애니골길 70)
관람료 : 무료
문의 : 031-901-2200

 

전시가 열리는 풍동 아트스페이스 애니꼴 전경. 카페 애니골의 2층 공간에 마련된 순수미술 전시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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