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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적하던 골목 빈 집, 즐거운 예술 아지트로 변신 중화전동 벌말에 작업장 꾸린 한선현 조각가
  • 유경종 기자
  • 승인 2018.01.08 15:53
  • 호수 1353
  • 댓글 0

문 닫은 구멍가게 고스란히 이어받아
이웃과 소통하며 문화 공감대 확산
도시재생사업, 새로운 가능성 열려 
“벌말 밝은 거리에서 만나요”

 

화전동 벌말의 오래된 구멍가게 '화전상회'를 주민과 소통하는 일상속의 예술공간으로 변모시키고 있는 한선현 조각가.


“50여 년 전부터 뜨거운 연탄, 맛있는 쌀을 팔았던 (구)화전상회가 조각가 한선현의 작업공간 ‘안녕! 화전상회’로 새롭게 출발합니다.”

마을 구멍가게가 예술가의 아틀리에로 변신했다. 하지만 고상함과는 거리가 먼, 겸손하고 유쾌한 변신이다. 서두에 인용한 작가의 인사말처럼, 가게의 외형과 이름을 고스란히 살렸기 때문이다. 이름만 살린 게 아니다. 화전상회의 새 주인장 한선현 조각가는 스스로 뜨거운 연탄과 맛있는 쌀이 돼 작은 마을에서 문화를 매개로 이웃들의 관계를 신명나게 복원시키고자 하는 꿈을 꾸고 있다. 

시간이 멈춘 마을에 생기 불어넣어

덕양구 화전동 벌말은 시간이 멈춘 마을이다. 필승부대(30사단) 정문 건너편에서 시작해 창릉천 제2화전교에 이르는 600m 골목을 따라 70~80년대 시대물을 촬영해도 좋을 풍경이 이어진다. 

한때 벌말은 식당, 약국, 자전자포, 전파사, 목공소 등이 줄지어 선 번화가였다. 인근에 커다란 운수회사가 두 군데나 있었고, 촘촘히 들어선 담장 너머로 사람 살아가는 소리가 넘나들었다. 하지만 각종 규제에 매여 개발에서 소외되면서 오늘날 벌말은 고양시에서 가장 낙후된 마을의 하나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퇴락해가던 벌말 골목에 한선현 작가가 둥지를 틀면서 지난해 봄부터 다시 웃음소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기자가 벌말을 찾은 날에도 한 작가는 작업실을 비우고 건너편 ‘한국공작소’ 마당에서 난롯불을 쬐며 이웃들과 믹스커피를 나눠 마시고 있었다. 철을 주물러 각종 기계를 만드는 ‘한국공작소’를 오랜 세월 운영해 온 골목 토박이 청해 스님은 한 작가를 가장 먼저 반겨 준 이웃이다.  

“오래된 화전상회 간판을 그대로 쓰겠다고 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한 작가님이 오고 나서 골목에 사람 사는 온기가 돌기 시작했어요.”

청해 스님뿐 아니라 한국공작소 바로 옆에서 ‘코리아트러스’를 운영하는 배남석 실장도 한 작가가 펼치고자 하는 마을 살리기 사업에 뜻을 모으기로 했다. 코리아트러스는 방송국 무대 세트를 제작하는 작업장이다. 기계공작소와 세트제작공장이야말로 아이디어와 영감을 어떻게 더하느냐에 따라 멋진 예술 생산기지로 재탄생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한 매력적인 공간이라는 게 한선현 작가의 생각이다.  
 

(사진 왼쪽부터), 한선현 조각가, 절친 이웃인 '한국공작소' 청해스님, 한 작가의 제자인 임헌민씨.

고양시와 인연 맺고 왕성하게 활동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한 작가는 이탈리아에서 미술공부를 하던 중 우연히 나무로 성당 문을 만드는 목조장인을 만나 나무 조각을 익혔다. 한국으로 돌아와 동심과 환상을 아우른 흥미로운 목조 작품을 연이어 선보이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고양시와의 인연도 깊다. 2004년 활동무대를 당진에서 서울로 옮겨 오며 자리를 잡은 곳이 바로 고양시 덕양구 덕은동에 있는 유림목재였다. 한 작가의 재능과 열정을 알아 본 유림목재 소일선 대표가 작업 공간과 목각 재료를 넉넉히 제공한 것. 한 작가는 소 대표의 호의를 멋진 작품으로 보답했다. 그 곳에서 한 작가는 “10년 넘는 세월 동안 작가로서 가장 이상적인 조건에서 작품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작가로서의 명성을 안겨다 준 ‘흰 염소와 전쟁, 그리고 평화전’과 ‘염소의 꿈, 그리고 만나다’ 등 수많은 전시를 열고 작품집을 낸 것도 유림목재에서 작업하던 시절이었다.

새로운 창작공간으로 고른 ‘화전상회’

하지만 유림목재가 자리한 덕은동 일대가 개발되면서 한 작가도 새로운 작업장을 찾아야 했다. 여러 곳을 둘러봤다는 그가 벌말과 화전상회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 

“마을 분위기도, 건물 크기도 제 정서와 딱 맞았기 때문이지요. 우선 화전상회 붙박이 간판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60년 전에 지어진 건물인데 타일로 흰 바탕에 검은색으로 글씨를 써 놓은 디자인이 굉장히 멋지잖아요.”

그의 말대로 화전상회는 오래된 간판 디자인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상호 양쪽에는 ‘삼천리 연탄’과 ‘쌀’이라는 글씨도 선명하다. 오랜 세월 동안 도시 변두리 서민들의 삶의 애환이 축적된 공간이 이제 자신의 수명을 다 하고 바통을 예술가에게 넘겨 준 셈이다.

한 작가는 화전상회 건물의 외형을 고스란히 살려 아예 자신의 작업실 이름으로 정해버렸다. 명함에도 ‘안녕, 화전상회’라고 큰 글씨로 박아 넣었다. 

“안녕은 내 작업의 궁극적 모토입니다. 나와 이웃,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인사입니다.”

가게를 수리하며 작가는 전면을 커다란 통유리로 마감했다. 유리 안쪽으로는 나무로 만든 유쾌하고 발랄한 나무 조각 작품들이 진열돼 있다. 골목을 오가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언제든지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지어진 벌말 '화전상회'는 연탄과 쌀이 적힌 간판이 말해주듯, 최근까지도 마을 주민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하던 가게였다.
길거리를 지나는 이웃들이 편안하게 들여다 볼 수 있도록 꾸민 입구의 전시공간.

 
절친 미술감독 이웃으로 합세 

화전상회의 새 주인장이 된 한 작가는 친한 예술가 한 명도 이웃으로 끌여들였다. 애니메이션 제작자이자 오토마타(기계장치로 움직이는 미술 작품) 연구소를 운영하는 이석연 미술감독이다.
“화전상회 입주식을 열자마자 9일 만에 바로 옆 건물을 이 감독과 함께 장기 임대했어요. 기가 막힌 행운이었죠. 덕분에 일거리는 잔뜩 늘었지만요.”

37평 화전상회에 비해 옆 건물은 120여 평에 가까울만큼 넓다. 자그마치 15세대가 복작거리고 살았던 다가구주택이었기 때문. 기와지붕을 맞댄 건물 여러 채가 작은 마당을 공유하며 올망졸망 붙어 있는 건물은 구조 자체가 작품이다.  

두 사람은 6개월 가까이 공간을 청소하고 최소한의 마감 작업을 마쳤다. 청해스님은 주특기를 살려 멋진 철 대문을 제작해 두 건물 사이에 달아주며 공사 마무리를 축하해줬다.

구석구석 보물창고 같은 매력을 품고 있는 건물을 얻으며, 두 사람이 벌일 수 있는 꿈의 크기도 훌쩍 커져버렸다. 새로운 공간에 작업장 한 칸을 얻어볼까 궁리하며 군침을 흘리는 예술가들의 문의도 이어진다. 
“우선은 ‘안녕, 화전상회’와 새로 꾸민 공간을 활용해 목공과 오토마타 체험을 비롯해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벌이려고 합니다. 그 이후에 또 어떤 신나는 일들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르죠(웃음).”    
 

한선현 작 '정열 염소'


“기억을 지우지 않는 재생 꿈꿔”

공간을 뜯어고치는 ‘막노동’에 열중하느라  본업인 조각작업에 지장을 겪고 있지만, 한 작가는 여유만만하다. 
“폐기된 건물에 새로운 용도를 부여하고, 마을의 관계망을 복원하는 일 자체가 나에게는 또 하나의 창작 작업입니다. 어쩌면 그동안 해왔던 것보다 더 큰 의미가 담기는 작업일 수도 있구요.” 

한 작가가 구멍가게를 예술 창작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과정은 다른 예술인들에게도 영감을 불어넣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김진남 감독은 4년 정도의 긴 호흡으로 한 작가의 ‘공간 재생 작업’을 영상에 담겠다고 나섰다.

한 작가와 이웃들이 시작한 골목 살리기 작업은 시 도시재생사업 담당자의 눈에 띄어 마을재생사업을 함께 설계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윤용선 도시재생팀장은 “토박이 구성원들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품은 예술가가 자연스럽게 마음을 합쳐 새로운 상상력을 만들어내는 벌말의 경우는 무척 흥미로운 사례”라고 평가했다.   

현재 벌말에는 주변 공장지대에 음식을 배달하는 식당과 철물점, 미용실 등의 가게가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다. 초입에는 어르신들이 들르는 노인회관이 있고, 나름의 커뮤니티 공간 역할을 하는 교회도 있다. 주거비가 저렴한 지역을 찾아들어온 다문화 이주노동자들도 40여 명 깃들어 살고 있다. 한 작가는 이들 모두를 아우르는 마을 재생사업을 조심스레 꿈꾼다.
“재생이라는 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의미잖아요. 이전 것을 지워버리고 낯선 것을 들여놓는 재생은 올바른 방식이 아니지요.”

그런 까닭에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에 굳이 ‘예술가 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주민들의 추억 위에 ‘예술’이 점령군처럼 군림하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아서다.  
“서민들이 고단한 삶을 의지했던 보금자리였고, 수많은 아이들이 태어나고 성장했을 마을의 오랜 기억들을 새로운 예술적 감성으로 꽃피워보고 싶습니다.” 
 

'안녕! 화전상회'로 들어서면 펼쳐지는 작품 전시공간.

 

한선현 작 '안녕! 친구들'

 

나무로 조각한 염소 작품 앞에 선 한선현 작가. 염소는 작가의 자아를 투영한 대상이다.

 

유경종 기자  duney78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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